brunch

사랑이 아직도 누아르예요.

한정현, 『러브 누아르』(북다, 2024)

by ㄱㅕㅇㅇㅣ

책을 도통 못 읽고 있을 때, 가볍게 탁- 하고 펼치기 쉬운 북다의 '달달북다' 시리즈(✱)는 애정하기도 쉽다. 금세 읽힌다. 완독 경험을 선사하는 것까지가 이 시리즈의 임무인 듯이.


그러나 단번에 읽히는 건 별개의 문제, 한정현 작가의 <러브 누아르>가 그랬다. 하필 여행길에서 펼쳐서일까. 초여름 바다 앞에서 발을 담글까 말까 망설이는 사람처럼 이야기에 빠져들까 하면 내 시선은 길을 샜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다시 펼친 책에서, 주인공 '선'을 만나 그때도 틀리고 지금도 틀린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 걔가 무슨 그 얼굴로 남자 따라갔겠어? 사람들은 그러며 잔뜩 안쓰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남영동 갔겠지.


그때 그 시절 남영동에 다녀왔다는 의미는 긴 설명하지 않아도 알겠지. 소설은 이렇게 진짜인 양 굴 때가 있다. '선'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가 살았고, 혐의도 없는데 남영동으로 끌려갔다 왔다. "이른바 '관뚜껑 고문"이라는, 강판에 매달아 놓고 무차별적으로 구타하는 고문"도 당하지 않고서. 멀쩡한 몸으로 돌아와 소설 뭉치 정도 거뜬히 넣을 수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들고 다닌다. 자신의 방 한 칸이 남영동 어느 방 한 칸과 닮아 있어서 공포에 떨며 불을 끄지 못하고 자는 것 빼면은 멀쩡해 보였다.


그는 원고를 들고 어딘가로 가고 있었고, 소설은 자연스레 원고에 쓰인 소설 <서울 누아르>의 일부를 소개한다. 그러면서 이야기는 한층 더 건너뛴다. 1년 전 선이 한양물산에서 일하던 시절로.


그곳에서 선은 매일 무언가를 끄적이는 '미쓰 리' 언니를 매일 만난다. 이름 없이 성 앞에 미쓰Miss를 붙여 부르던 곳, 미쓰 리의 원래 이름은 무얼까? 그런 게 중요한가? 어느 날, 선은 미쓰 리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미쓰 박은 뭐가 되고 싶어요?

미쓰 박 되고 싶은 거 없어요?

저는⋯⋯ 주판을 좀 잘하는 사람이요.

그러면 정말 웃지 마요, 끝까지 이 회사에 남아야죠. (✱✱)


웃지 말라는 말뿐, 미쓰 리는 선에게 "니가 뭐라고, 시집이나 가라"라는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그런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선이다. 자고로 여자란 남자에게 시집을 잘 가야 팔자가 편다는 말. 그게 바로 여자의 성공이란 말. 서울로 가는 것도 농사짓는 남자보단 공장이라도 다니는 남자를 만나야 하기 때문이라고들 했다.


나의 이모는 고향을 떠나 공장을 다녔었다. 돈을 벌고, 돈을 부치고, 다시 돈을 벌고⋯⋯. 그런 삶을 얼마나 이어갔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이모는 어느 날 동생인 엄마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공부할 거민 시에 가라, 내일 선생님한테 가서 제주시 간댄 해."


시내로 간다는 건 유학 간다는 말, 덕분에 엄마는 제주시 소재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장에서 일하지 않고, "시집이나" 가지 않고, 시내로 가서 공부를 한 엄마는 대학도 입학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과 결코 닮아서는 안 된다는 언니의 염원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졸업장과 입학통지서였다.











우리 엄마의 삶과 달리, 소설 속 엔딩은 달랐다. "그러면 정말 웃지 마요, 끝까지 이 회사에 남아야죠." 공장에서는 미쓰 리 말대로 웃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나은 정도가 아니라 한양물산에서 미소를 지어 보이는 건 미쓰 리의 지조를 무너뜨리는 일일지도 몰랐다. 그는 여성 노동자 독서 모임 '아카시아'를 열기도 했고, 항상 무언가를 끄적였으니까.


대체 무얼 끄적였는지, 그가 다니는 독서모임이 어떤 의미인지, 심지어 미쓰 리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은 그렇게 남영동을 다녀온 사람이 되어 있었다. 사라진 미쓰 리를 혹시라도 만날 새라 서대문 형무소를 지나쳤다.


그 뒤로 선은 어떻게 살게 될까? 미쓰 리는 어떻게 되었지? 그나저나 <러브 누아르>는 왜 서울이 아니지? 서울을 대체할 단어가 러브라면⋯⋯ 사랑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무엇보다 이곳은⋯⋯ 남자와 여자를 짝지어준다는 사이비 종교의 거대한 운동장과 같은 판이다. 남자와 여자는 무조건 사랑에 빠지고 엉겨 붙는 줄 아는⋯⋯ 서울은 그런 곳이다. 그 끝은 결혼이어야 하는 막장 드라마. 그 결혼이 행복이든, 이혼 특급 열차든 여자는 나이가 차면 폐물 취급당하는 그곳이 서울. 이곳에 '나'는 없다.


1980년대 서울이었다. 지금은 얼마나 다른가.
















✱ 12명의 작가와 각기 다른 모양의 로맨스 서사를 그리는 북다의 국내문학 시리즈. 단편소설과 작업일기 한 편씩 실려 있다.


✱✱ 미쓰 리와 선의 대화체만 따와 인용하였습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쓸모를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