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선택해도 난 교외로.
타지역으로 발령 받으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은 아마 '살 집'일 거예요.
물론 직장에서 관사나 사택을 주는 경우에는 고민거리가 아니겠지만요. 절 제주도까지 파견 보낸 기관은 야속하게도 관사를 주지 않았습니다. 그 덕(?)에 제가 살고 싶은 곳 을 정할 기회가 생겼죠.
먼저 제주도 출신 동료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제주도에서 살 집 알아보려면 어디를 통해서 찾아봐야해?", "대충 제주도 살만한 원룸은 집세가 얼마나해?", "이 동네 좋아?", "바다 앞에서 살면 미친 짓이야?".
가장 충격적인 대답은 '집세'였습니다. 믿기질 않아서 여러번 되물어봤고, 인터넷에서 거듭 확인까지 해봤죠. 제주도는 서울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이고, 아무리 제주도가 관광지이지만 주거지역은 관광지역이 아니고, 인구 대비 땅이 워낙 넓으니 왠만한 지방보다 집세가 쌀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얼마냐고요?
제주 원룸 월세기준 50~70 만원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당황스러웠습니다.
'서울에서 동생이랑 같이 살고 있는 집이 월세 55만원인데,,, 아니 서울이랑 월세가 같다고?!'
저도 모르게 애꿎은 동료에게 괜히 성을 냈습니다. "아니, 제주도 뭐야? 제주 너무 한거 아니야? 제주가 뭐라고 어떻게 집세가 서울하고 같아? 참나, 어이가 없어서." 하지만 착한 제 동료는 미안한 말투로 방약무인인 절 위로해주면서 방 구하기 현지 채널을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오일장신문.
육지의 '벼룩시장' 같은 정보지와 비슷합니다. 육지와 같이 동일한 매물이 오일장신문 뿐만 아니라 각종 부동산 카페, 커뮤니티 등에 중복으로 매물이 게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2017년~2018년 기준으로 제주 시내 원룸의 월세는 대충 60만원 내외인 것 같아요. 그런데 위 캡처 사진을 보면 특이한 점이 있죠? 예를 들어 왼쪽 상단 첫번째 매물의 '가격' 부분을 보면 '300/650만원'으로 되어있습니다.
다른 매물을 보니 왼쪽 금액이 보증금인지는 알겠는데, 오른쪽은 뭐지? 보증금보다 비싼건 뭐지? 설마 저게 월세인가?
제주는 연세(年貰)가 주(主).
네. 연세였어요. 다른 지역은 어떤지 잘모르지만 제주 연세는 특징이 있습니다. 1년치 월세를 한번에 몽땅 내는 대신 한달치 월세를 깎아 줍니다. 제주도 부동산을 기반으로 사업하시는 도민에 따르면 제주 연세는 유래가 깊었다고 하네요. 보통 사람의 한달 월급이 연세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시 약 100만원 정도였던 연세가 확 뛴 계기가 있었는데 바로 '다음(daum)'의 제주 이전으로 대표되는 이주민들의 급증이라고 합니다. 아래 자료를 보면 2010년부터 제주도 순유입 인구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는데요. 연령대를 보면 30대 이상 성인과 10세 미만 어린이입니다. 즉 가족이 늘어났고 당연히 가족이 살 집에 대한 수요가 많아진 것입니다. 그 뒤 중국인들의 부동산 러시 등으로 제주 전역의 부동산 값이 뛰면서 오늘날의 연세가 형성되었다네요. 제주도 부동산을 공부하다보면 2000년대 이후 제주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제주 임기가 1년 4개월이라 일단은 1년치 연세만 내고 나머지 4개월치는 그때가서 뭐 어떻게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미뤘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하고 복비를 주고 나서도 집세에 대한 투덜거림이 그치지 않았지만, 아무튼 그렇게 1년치 살집을 마련했습니다. 어디로요?
다음에 제대로 다룰 주제이지만, 전 '서핑(surfing)' 때문에 이호테우 해변 근처로 집을 잡았습니다. 클라이밍을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지 익스트림 스포츠에 관심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서핑도 꼭 해보고 싶었습니다. 제주로 임지가 결정이 되니 제 머리속은 온통 서핑 뿐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제주 서핑 스팟 주변에 있는 집을 찾아보게 되었죠. 그래도 '너 놀러왔냐? 일 때문에 온 곳인데 직장하고 가까운 시내에서 살아야 고생을 안하지'라는 현실론과 '아니야, 평생 한번 뿐 일지도 모르는 제주생활이고 서핑도 해야하는데 서핑 스팟에서 살자'라는 낭만론이 부딪쳤습니다. 결국 제가 아직도 철 없이 낭만을 쫓는 사람이라 후자를 선택했습니다.
서울에서는 출퇴근 시간이 한시간을 넘지 않으면 '그럭저럭 다닐만 하고만!' 하죠. 문제는 저 뿐 아니라 많은 '발령받은 자'들이 제주에서도 그 시간 개념을 그대로 적용했다는 점입니다. '육지' 사람들의 시간, 공간 개념으로는 제주도 전역이 하루 생활권처럼 느껴질 수 있습니다. 특히 제주도에서 렌트카로 여행을 좀 해본 사람의 경우에는 성산에서 한림이 아니라면 왠만한 곳은 1시간 이내로 다녔던 기억이 있죠.
저도 집과 직장 간의 물리적 거리는 큰 장애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놀라운 '적응력'을 간과했었죠. 제가 이호테우 근처에 집을 잡았다니 제주도민 동료들이 혀를 쯧쯧 찼습니다.
'좀만 다녀봐라,,, 엄청 후회할거다,,,'
실제로 얼마 전에 육지에서 내려온 어떤 직원은 서귀포에 집을 잡았다가 한달만에 제주 시내로 들어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제주 시내에서 서귀포 시내 이동시간이 1시간 정도이지만, 제주도의 시공간 기준으로는 마치 대전에서 서울로 출퇴근 하는 것과 비슷할 수도 있습니다.
제주도에 어느 정도 살게 되면 정말 신기할 정도로 공간 인식범위가 좁아집니다. 위 제주시내 지도를 보면 제주도청이 있는 동네가 '신제주(노형동, 연동 등)'이고 오른쪽 제주시청이 있는 지역이 '구제주(삼도동, 이도동, 아라동 등)'입니다. 제주 사람들은 신제주에서 구제주로(혹은 그 반대로) 넘어가는 것을 굉장히 번거로워 합니다. 생활권이 완전히 달라요. 특별한 일이 아니면 넘나들지 않습니다.
인식이 이런데, 전 신제주 끝에 붙어있는 집에서 구제주 한복판에 있는 근무지로 출퇴근하니 얼마나 제주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보였겠어요. 실제로 대략 출퇴근 시간이 자차로 30~40분, 버스로 40~50분 걸립니다. 서울로 치자면 일산에서 판교 출퇴근에 비유될까요?아하하. 제주 시내 출퇴근 교통체증은 올림픽대로 반포 부분과 흡사해요. 체감상.
지금까지는 '현실론'이었습니다. 사실 전 매우 만족해요(이제와서?). 현재 집이 제주공항 활주로 근처에 있어서 하루에도 몇번이나 아파트 만한 비행기가 머리 위로 지나가는 것을 봅니다. 대학생때까지 비행기라는 것을 저멀리 비행기 구름으로 본 것이 전부인 촌놈에게 비행기의 이륙, 착륙 장면은 정말이지 탄성을 자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볼 때마다 신기합니다. 질리지 않아요. 시끄럽지 않냐고 다들 걱정하는데요. 물론 창문 열어두면 시끄러워요. 저에겐 그것보단 신기한게 더 크답니다. 그리고 여름에는 이호동, 도두동, 용담동 등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 '공항소음방지법'에 따른 냉방전기료 지원을 해줍니다. 작년에는 7~9월 세달치를 주었고, 올해(2018년)부터는 6~9월까지 넉달치 전기료를 지원해 준다고 해요(한달 5만원). 여름 보너스.
솔직히 출근할 때는 시간에 쫓기니 불편합니다. 하지만 퇴근할 때는 시내에 사는 사람들이 느끼지 못하는 것을 향유할 수 있습니다. 애월 바다 쪽으로 떨어지는 낙조를 보면서 퇴근할 수 있다는 점이죠. 그 사이로 비행기가 내려오는 것까지 더하면 이국적인 운치는 배가 됩니다. 저녁에는 돗자리랑 맥주를 사들고 걸어서 10분만 가면 말 등대가 보이는 이호테우 해변에서 치맥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평일에도요. 애월은 또 어떻고요. 주말 오전에는 집 근처 해안 노천탕이 있는 사우나에서 목욕을 하고, 그 옆 해녀의 집에 가서 전복죽이랑 뿔소라, 그리고 '하얀거'도 먹고 오곤 합니다. 목욕이든 전북죽이든 눈 앞은 물론 바다죠. 이게 다 차로 15분 거리.
이뿐인가요?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면 바다냄새와 산냄새가 묘하게 섞인 아침공기를 맡게 됩니다. 눈으로는 한라산을 보며 말이죠. 그리고 제주 서핑 스팟인 이호테우 해변이 코앞이라 파도 차트가 좋은 날에는 가끔 새벽 서핑도 하고 출근합니다. 일찍 일어나서 가는 것이 여간 힘든 것이 아니지만, 엎어지면 코닿는 곳이라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제주도로 발령 받으신 분들, 제주도에 평생 살거 아니잖아요? 제주 생활 3년 넘어가면 '출륙(出陸)'이 어렵다지만. 발령 기간이 보통은 1~2년 기간이니까요.
그렇다면 제 말 믿고 용기 내어 제주도를 최대한 느낄 수 있는 곳에서 살아 봐요(서귀포시에서 제주시로 출퇴근하는 건 말릴게요). 주변에 편의점 하나 있음 다행이고, 폭설 내리면 강제 방콕이 되며, 회식이라도 하면 택시 찾아 삼만리 해야하지만요.
직장 근처나 시내에 살면,
'생활'이 호시탐탐 '낭만'을 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