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글도 모른 채, 국민학교 2학년에 진학하다.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by wonderfulharu

나는 봄꽃이 피는 3월에 태어났다. 1남 3녀 중 둘째로.

‘둘째는 눈치빠르고 똑똑하다’고들 하지 않던가. 아마도 우리 부모님께서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것 같다. 4살 무렵, 아버지의 일본 근무 발령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기억이 정확하진 않지만, 엄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일본어 회화책을 아무리 봐도 입에서 말이 안 나오더라. 근데 너는 TV 몇 번 보더니 갑자기 일본어가 술술 나왔어.”


그렇게 나의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5살에 현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했고, 7살에는 일본 소학교에 입학했다. 일본은 4월이 새 학기라 3월생인 나는 입학이 가능했다. 어느새 나는 ‘일본어 본토 발음의 한국 아이’가 되어 있었고, 한국어는 부모님이 집에서 쓰는 말을 대충 알아듣는 정도였다. 한글은, 아예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의 귀국 발령 소식이 들렸다. 우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나에게는 또다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문제는... 이제 나는 국민학교에 다녀야 한다는 것. 그것도 한글도 모르는 상태에서. 엄마 손을 꼭 잡고 00 국민학교 교장실에 들어갔다. 나는 원래 1학년에 입학하는 것이 맞았지만, 그 시점은 이미 2학년 수업이 한창 진행 중인 시기였다. 고민하던 학교 측에 엄마는 자신 있게 말했다. “우리 딸 똑똑해요. 책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한국어 금방 익혀요.” 그 말 한마디에, 교장선생님도 “고 녀석 똘똘해 보이네요”하고 답하셨고 나는 한글도 모른 채 2학년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그 후의 날들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다.’ 문제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시험을 제대로 볼 수 있었겠는가. 50점이면 기적이었다. 친구들은 내가 일본에서 가져온 물건을 신기해하며 가져가기도 했고, 말이 서툰 나를 “친일파”라고 놀리기도 했다. 서러움에 눈물이 났고, 그때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한국에 돌아올 거면, 한글이라도 좀 가르쳐주지…’


8살의 나는 너무도 큰 교실 속에서 작아졌다. 내편이 없는 외로움은 또 얼마나 크던지. 어느 순간 이렇게 다짐하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나는 공부해야 해.’ 그 생각은 점차 현실이 되었다. 이후 우리 가족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갔고, 나는 새 학교로 전학을 갔다. 여전히 ‘친일파’라는 말은 따라다녔지만, 나는 꿋꿋이 공부했다.


중학교 입학 전 치른 반 배치고사에서 나는 꽤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주위 어른들은 칭찬했지만, 나는 스스로를 칭찬할 줄 몰랐다. 머릿속에는 '조금만 더 잘했으면 1등이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만 가득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 어린아이는 참 잘 버텼고, 대견했다. 만약 지금의 나라면, 그 작은 등을 꼭 안아주었을 것이다. “너무 잘했어. 이미 충분히 했냈어."라고.


그러나 어린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오히려 더 잘해야 한다는 조급함과, 아직 모자란 자신을 탓하는 마음만 가득 안은 채. 그렇게 몸에 밴 불안과 자책은 습관이 되었고,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교실속 혼자.jpg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늘도 원더풀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