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영합니다

잃어버린 유럽

by 원더혜숙


2019년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 두 달간의 한국 방문을 마무리하고 독일로 출국했다. 될 수 있으면 자주 귀국해야지,했던 결심은 팬데믹으로 무산됐다. 그간 물리적 격리가 심리에서도 작용했던 것인지 나는부모님과의 연락이 뜸했고 내 삶에 집중했다.


간혹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밥은?"

"애들은?"

"시부모님께 잘해.”


부재중 메시지처럼 반복되는 엄마의 질문에 대한 답은 단답형에 머물기 십상이었고, 소원한 관계를 좁히기 어려웠다. 그 사이, 엄마는 두 무릎 수술을 했고 아버지는 심장이 안 좋아 여러 번 검사 했다. 멀리 있는 딸을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비밀로 한 부모님의 건강 이상 소식은 나를 내놓은 자식, 무관심한 딸로 만들었다.


그게 편할 때가 있었다. 큰 오빠 내외가 부모님과 동거하며 그들을 돌보고 그들의 재산까지 공유한 듯 살아도 그럴만하다고 여겼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자식이 해외에서 마음 놓고 자기 삶에만 집중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부모님이 안 그립고, 안 보고 싶겠는가. 가족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팬더믹으로 길어질수록 더 커졌다.



팬더믹이 지났다. 아버지는 여든을 맞이했고, 엄마는 휴가를 얻었고, 사돈어른은 일을 맡기고 올 수 있는 든든한 직원이 생겼다. 농한기라고 해도 돌볼 가축도 있고, 감자 싹 틔우기, 들 둘러보기 등 농부에게 농사에 쉼이 있겠느냐만, 부모님은 딸 집에 놀러 오려고 할 일을 미뤘다. 그들이 자리를 비울 동안 할 일을 아들에게 맡겼고, 할 수 있는 일은 여행 전에 몰아서 했다. 올케 언니가 부모님의 항공권을 예매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도 일을 몰아서 하고, 집안을 구석 구석 청소했다.


부모님의 방문이 확정되었을 때, 나는 파리에서의 ‘나만’의 여행을 상상했다. 오르세 미술관을 가고,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 화가와 소설가의 창작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을. 그 상상에 부모님을 넣었다.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었다. 아무래도, 부조합이었다. 한편으로 호기심이 일었다. 시골 사람인 부모님이 미술관에서 무엇을 느낄까. 그들은 유럽을 좋아할까? 그들의 반응이 궁금했고, 어쨌든 그들이 직접 유럽을 보고 경험했으면 바랐다. 다른 한편으로 걱정했다. 나와 엄마 사이의 불협화음의 원인. ‘잔소리’ 를 어떻게 이겨 낼 것인지... 아버지의 무뚝뚝함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사돈어른의 고집을 잘 넘길 수 있을지... .


9년 전 독일 뮌헨 공항에 새벽에 도착했다. 2개월 된 아들에게 10시간 비행 내내 젖을 물리고 녹초가 됐다. 남편은 내 이름이 큼직하게 쓰인 플래카드를 들고 밝은 출국장에 수줍게 서 있었다. 그가 내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연예인을 기다리는 팬들이 그런 걸 들고 있는 걸 본 적 있다. 평범한 내가 그런 대접을 받아 좋으면서도 쑥스러웠다.


그때 생각이 났다. 나와 아이들은 유럽에 첫 발을 디디는 부모님과 사돈어른을 즐겁게 해 줄 요량으로 부랴부랴 플래카드를 만들었다. 나는 그들 이름을 하나씩 쓰고, 환영합니다.를 썼다. 그 옆에 폭죽을 그렸다. 구석에 첫째 아들은 말미잘 같은 폭죽을, 둘째 아들은 폭죽을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자 포기한 지렁이 두 마리를 그렸다. 남편이 프랑크푸르트로 부모님을 데리러 갔다오는 6시간 동안, 나는 앞으로 펼쳐질 여행을 다시 그렸다. 긴장되고 설렜다.


처음으로 부모님과 사돈어른이 내 집에 들어섰다. 그것은 부모님이 근처에 살아서 딸 집을 들리는 것과는 약간 다르고 좀 특별했다. 걱정을 많이 했지만, 막상 그들을 맞아 놓고 그냥 좋았다.


피곤해서 열린 문으로 들어오는 엄마, 그 뒤에 사돈어른. 아버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웃으면서 들어오셨다.

사돈어른이 내게 말했다.

“너무 좋다!”

그런 솔직한 표현이 그리웠고 듣고 싶었다. 엄마의 피곤하고 아픈 모습때문에 걱정했다가 그 말을 듣고 나는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사돈 어른의 말에 해피 바이러스가 들어있었던 듯, 그것에 전염되어 사돈 어른을 안고 엄마를 안고 아버지도 안았다. 그리고 다시 한번 사돈어른을 안았다. 그녀가 나를 너무 오래 안고 있어서 부끄러웠는데 엄마가 그때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너무 멀어. 너무 멀어. 이런 데로 시집을 보내 놓고 그렇게 멋도 모르고 살았으니….”


인천에서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까지 14시간( 러시아 전쟁으로 4시간 플러스)의 긴 비행, 프랑크 푸르트에서 우리 집까지 차로 3시간 긴 엄마는 몸소 경험해 보고서야 딸이 물리적으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사는 지 알았다.


엄마의 후회가 마음으로 전해졌다. 둘째를 낳을 때 딸을 보러 오지 않은 엄마를 원망했지만, 나는 엄마를 이제는 좀 이해한다. 집안 일을 하며 아버지 농사를 거들고, 늦은 밤이라도 장애인 돌보는 자기 일까지 하며 바쁘게 산다. 열심히 산다는 치하의 말이나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도 못 듣고 사는 엄마. 그래서 삶을 돌아볼 여유도 딸을 그리워할 틈이 없었을 것이다. 출국하는 전 날까지 할 일을 하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으리라.


엄마는 낮에는 들에서 일하고 저녁에 장애인 돌보는 일을 했다. 샤워 후 옷깃을 여미지도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도 않았다. 그렇게 추운 겨울 밤을 오토바이로 달렸고 감기에 걸렸다. 독일 시차 적응과 몸살 때문에 지친 엄마의 상태는 얼굴에서 나타났다. 노랗게 얼굴이 떴다. 엄마는 이틀 동안 잠만 잤다. 그런 엄마를 두고 아버지와 사돈 부인이 성화였다. 아버지는 엄마가 먹지도 않고 잠을 잔다고 내 앞에서 흉을 봤고, 사돈 어른은 약이라도 먹어야 한다고 혀를 끌끌 찼다.


새 언니에게 부모님과 사돈 어른이 독일에 잘 도착하고 시차 적응 중이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엄마가 몸살을 앓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엄마, 독일에 가면 몸살 걸린다고 내가 장담했지. 그냥 놔두면 힘내서 밥 먹을 거야. 내버려 둬."

새 언니의 반응이다. 이국 있는 딸보다 새 언니가 내 엄마를 더 잘 알았다.

"나 그냥, 잠만 자게 내버려 둬. 입맛이 하나도 없고, 나는 약을 먹기가 싫어." 라고 엄마는 아버지와 사돈 어른의 잔소리가 귀찮은 듯 말했다.


몸이 힘들어도 여기까지 와 준 엄마가 고마웠다. 나는 생강차를 끓이고, 아침에 빵을 사러 갔다가 치즈도 질 좋은 것으로 사고 ,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채소도 사고, 이것저것 부모님에게 맛을 보여주려고 빵을 여러 종류 담았다.


아이를 돌보는 일이나 부모님을 챙기는 일, 심지어 나 자신을 돌보는 일까지 크게 다르지 않다. 그 사람의 편안함을 생각하여 무거운 엉덩이를 박차고 움직이는 것이 기본이다. 부모님이 기뻐할 것을 생각하며 장을 본 그날 아침은 내 마음과 식탁이 풍성했다.



부모님과 사돈 어른이 오기 전, 프랑스 파리, 스위스, 인터라켄 그리고 집에서 북쪽으로 500km 되는 독일 쾰른까지 갈 계획을 했다. 기차로는 매끄러운 동선이 잘 나오지 않아 고민하고 있을 때, 남편이 자동차 여행을 권했다. 네 명이라면 기차보다 자동차 여행이 쌀 것이라고. 12월 크리스마스 연휴 전후로 자동차 여행을 한다는 가정하에 스위스 인터라켄, 프랑스 스트라스 부르, 프랑스 파리의 호텔을 예약했다. 그리고, 잠이 오지 않았다.


2016년 겨울, 시어머니와 시누이, 작은 아들(한 살)을 태우고 육십령처럼 꼬불꼬불한 국도를 따라 WMF 아웃렛에 가는 길이었다. 전날 눈이 내렸다. 아침 아홉 시, 산길은 미끄러웠다. 30km로 서행했다.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다. 차체가 오른쪽 왼쪽으로 기울었다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브레이크를 살살 밟고 오른쪽으로 커브를 돌다 중앙선을 넘었다. 맞은편 차선으로 오르던 벤츠 왼쪽 문을 박았다. 찌익 하는 철이 긁히는 소리를 내고 내 차선으로 돌아와 정차했다. 1초 후에 뒷 차가 내 차를 박았다. 충격은 크지 않았다.


다만 그날의 무감각은 지속됐다. <이방인>의 뫼르소가 태양이 쨍쨍 비쳐서,라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 때문에 살인하고 어머니의 죽음에서 무감각했듯이 나는 그걸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운전자인 나보다 긴장한 시누이가 남편에게 전화를 걸고 사람들의 안전을 묻고, 삼각대를 앞뒤로 세우고, 형광 조끼를 우리에게 입히고 상대방의 안전을 체크하는 동안 사고 피의자는 나는 그냥 얼얼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브레이크를 밟아도 빙판 노면에 차가 쭉 미끄러지는 느낌을 핸들과 바퀴, 그리고 마지막으로 균형을 잃은 차체를 온몸처럼 느끼면서.


한동안 핸들을 잡을 수 없었다. 중앙선 침범으로 50유로 벌금을 내고, 남편이 자동차 종합보험으로 바꾸고 그리고 차가 수리 후 말끔하게 새 덮개를 씌우고 나서도 한참 동안. 슈퍼에 가고 아이들 생일 파티로 친구 집에 데려다는 용도로 운전했다. 사고 트라우마로 운전이 두려웠다. 되도록 고속도로를 피했지만 어쩔 수 없을 때는 아우토반에 진입하면서 벌벌 떨었다. 원거리 운전과 낯선 길 운전은 피했다. 남편이 운전을 더 잘 하고 안전하고 빠르니 일부러 운전대를 잡을 이유는 없어서 오랫동안 가능했던 일이다.


운전해서 프랑스 파리를 갈 생각에 불안해졌다. 여행 일정을 조절하고, 부모님편에 보낼 물건을 상의하는 중이었다.

“언니, 나 운전할 걸 생각하니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혀. 다른 건 다 잘할 수 있는데…”

새 언니가 무심코 던지듯 내게 말했다.

“우리 엄마 운전 잘 해. 국제 면허증으로 바꿔 보낼게.”

그 말에 마음이 살짝 놓였다. 여차하며 사돈 어른에게 운전대를 맡기면 되니깐. 차 보험에도 사돈어른을 제3운전자로 등록했다.


인터라켄으로 떠나는 날 아침이었다. '여차하면'라는 최후의 선택이 있었지만 처음은 내가 운전을 해야 할 것 같았다. 긴장때문에 운전대를 끌어안듯이 잡았다. 편안히 좌석 등에 기대야 시야가 넓어질 텐데, 이런 운전 자세를 보면 내가봐도 초보다. 그래도 그 구부정한 자세가 편했다. 그렇게 한 시간쯤 운전했던 것 같다. 오전 아홉시, 날은 밝아도 독일 겨울은 회색빛으로 어둑어둑했다. 히터에서 나온 따뜻한 바람과 네 명이 만들어내는 온기가 운전수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 때 보조자 석에 앉았던 사돈 어른이 말했다.

“숙아, 네가 운전하는 걸 보니 안되겠다. 나한테 줘라. 그렇게 운전해서 오늘 안에 인터라켄에 도착하겠니? 고속도로는 한국이랑 다른 게 없으니깐 내가 운전할게.”

"아니, 괜찮은데요.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내가 엄마하고 아버지를 모시고 강원도에서 거창까지 얼마나 많이 달렸는 줄 알아? 어떤 때는 세 시간 만에 도착했어. 엄마가 주말에 놀고 다음날 아침에 일 있다고 해서, 그거 맞춘다고 새벽부터 일어나서 딱 집에 데려다주고 잠시 쉬고 다시 강원도로 올라왔잖아.”


좋아하지 않고서, 누구를 위하는 마음이 없고서는 이런 자기 희생을 할 수 없다. 사돈 어른과 부모님은 사돈을 맺고 나서 집안의 흉사와 경사를 알아가며 상부상조하고 마음을 터놓은 사이가 되었다. 이제는 함께 늙어간다. 함께 세상 구경을 다닌다. 계약과 예약, 운전은 사돈어른이 하고, 돈과 음식은 부모님이 댄다.


"제가 운전이 좀 서툴긴 하죠. 게다가 좀 느리고." 라고 말하면서 운전대를 넘겼다. 뒷좌석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돈을 쌓아 두고 사는 재미, 꼭 붙드는 재미로 사는 거야. 얼마나 지독한지. 평생을 얼굴 보고 지금까지 살면서 말이야. 자식들 잘 되는 이야기나 속 이야기는 절대로 안 해. 그 짜기는 얼마나 짠지, 자기 칠순에 생일턱 안 내려고 아무 말도 안 하고 넘어가는 거 봐.”


경사라면 동네 사람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는 인사치레를 꼭 했던 부모님은 그렇지 않는 동네 사람들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다. 돈을 쥐고 있기보다는 쓸 데는 써야 한다고 믿는 신념을 가졌다. 그런 그들의 변화가 원래부터 있었던 것 같으면서, 결코 그렇지 않다. 그것은 새언니가 우리 집에 시집오고 난 이후의 변화다. 우리 집에 신 바람이 분 것처럼 보이는데, 부모님은 돈이 모이는 대로 인근의 좋은 토지를 샀다. 농부의 마음에서 토지가 전부였다. 손자와 며느리가 생기면서 그 돈을 조금씩 풀기 시작했고, 열 가구 시골 동네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먼저 신식 주택을 지었고, 트럭이며 보일러며 건조기 같은 좋은 기계를 들였다. 즉, 삶을 편리하게 하는데 지출하고 이제는 삶을 즐기는 여행으로까지 소비 영역이 확장되었다. 부모님은 몇몇 동네 이웃들이 도널드 덕처럼 동전 풀에서 수영하는 것처럼 하기보다 시간 날 때마다 중국, 캄보디아, 태국, 일본 등지로 여행을 하셨다.


“그래요. 아버지 다 쓰세요. 쟁여 놓는다고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라고 내가 대답했다.

“이집터를 한번 가 봐야겠어.”라고 아버지가 대뜸 말했다.


아까전까지 꾸벅꾸벅 졸던 엄마는 아버지가 그 말을 하자마자 아버지에게 눈을 흘깃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는 얼굴을 했다. 나 역시 아버지가 과연 이집트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 걸까. 과연 거기에 가서 무엇을 하시려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평생 농사를 짓고, 여든인 아버지는 문맹은 겨우 면했지만 가방을 멘 일이 전무하다. 여름엔 농사를 겨울에는 산판에서 나무를 벴다. 그는 일을 열심히 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책임감 있는 남자였다. 가끔 산에서 영지버섯을 따서 식탁에 툭 던지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단순하다.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아버지는 지주야.”라고 사돈 어른이 말했다.

그게 사실인지 아닌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몇 해전만 해도 오빠의 사업 실패로 빚에 쪼들리고 있었고, 나는 일찍이 해외에 살면서 부모님의 경제 사정을 매일 구진 독일 날씨처럼 좋은 적이 없다고만 추측할 뿐이었다. 과장된 말이었더라도 지금은 유럽 여행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고, 땅과 단독 주택이 있는 아버지이었다. 나는 어디라도 여행하겠다는 아버지의 의욕이 좋았다.


“당신은 이집…터가 어딘 줄 알아?”


엄마의 영어발음은 아버지보다 엉망이었다. 남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패르디난드라고 알려줘도,

"패이난,훼이난. 패지난, 아하하하하. 이거 왜 이리 잘 안돼노. 성이 후버니깐 그냥 후서방으로 하자."라고 쉬운 성으로 부르기로 결정했다.


“그게 중요해?”아버지가 엄마의 말에 톡 쏘듯이 답했다.

아버지는 포인트를 잘 잡았다. 그게 어디건 원하면 딸과 며느리와 사돈 어른이 데려다줄 것을 그는 찰떡같이 믿고 있다. 사실상 지금까지 그래왔고, 멀기만 생각했던 유럽까지 왔다. 이제 그의 생각은 세계 곳곳에 닿을 생각으로 부풀어 있었다.


“아부지, 제가 통역하고 다 할 테니. 아버지는 돈만 내세요.”라고 내가 말했다.

“아버지는 내년에 일본에도 가 보시려고 하는걸. ‘나쁜 놈의 나라’라도 구경은 한번 해야 한다고. 강원도에서 배를 타고 홋카이도는 멀지 않으니. 5월 엄마 생일 맞춰서 잠시 시간 날 때 갔다 오면은 좋을 것 같아.”라고 사돈 어른이 말했다.

“언니가 저보고 통역 좀 하라고 하던데요.”내가 말했다.

“아니, 우리는 늙은이는 우리끼리 갔다 오는 게 편해. 젊은 사람들은 알아서 갔다 오고.”

사돈 어른의 말도 맞았다. 내가 화제를 돌렸다.

"오렌지 좀 까드릴까요?"

내가 깐 오렌지가 차 안에 향긋하게 퍼졌다. 살살 까서 두 조각을 사돈 어른께 드리고, 남은 걸 뒤로 넘겼다.

“그거 아세요. 지금 독일 아우토반에서 운전대를 잡으시는 거예요.”

라고 내가 사돈 어른의 기분을 돋았다.

“독일 아우토반은 가만히 있으면 뒤에서 날아오네. 그리고 옆에 트럭들 때문에 졸아서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음대로 달린다고 못하겠어.”

“그래도 이게 한국 남자들이 로망하는 그, 아우토반이라고요.”

그렇게 말했지만, 사돈 어른의 판단도 맞았다.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데, 독일에는 중간중간 공사 구간이 많아서 내비게이션이 있어도 운전하기 어렵고 둘러 둘러서 가야 해요.”이왕 나온 김에 독일 아우토반에서 힘껏 달리는 일이 실제로는 기대만큼 신나는 일이 아니라는 걸 그녀도 직접 경험할 것이다. 게다가 소형차에 어른 네 사람과 짐을 가득 싣고 고속으로 달리는 것은 무모하기도 했다. 렌트해서 혼자, 이왕이면 월요일 오전 출근 시간이 지난 다음 한적한 독일 아우토반을 달리는 기분은 정말 좋을 것이다. 미끄러지듯이 나아가면 마력을 따질 만큼 차의 엔진 성능이 중요해진다. 하루종일 개지 않는 잿빛 하늘을 보며 우리는 독일 스투트 가르트를 거치고, 오스트리아 보덴 호를 거치고 스위스에 들어섰다. 아직 가을빛이 남아있는 나무, 쭉쭉 뻣은 가문비 나무를 보고 부모님과 사돈 어른은 현실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행이다. 막상, 오고 나서 아무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만큼 가이드의 입장에서 어색한 일이 없다.






이전 01화평균 72세 어른들과, 유럽 자유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