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차하면 잡을 수 있게 양쪽 브레이크에 손에 대고 내리막을 내려간다. 속도가 점점 붙는다. 앞머리와 귓머리가 수평으로 날리고, 양볼에 거친 바람이 스친다. 맞은편에서 차가 고속으로 올라오면 어쩌지? 오르막에 누가 있을 거란 걸 예상하지 못한 채, 힘껏 속도를 올린다면, 그러면, 나는 정면으로 충돌해서 죽겠지. 아, 끔찍하다. 그 통증, 그리고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고 내가 사라지는 기분.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학교에서 돌아와 안방에서 뒹글 거리는 것도 지겨워진 오후 세 시, 열기는 수그러들었다. 마당 흙은 푸석했다. 마루에 나가자 5미터 앞의 외양간에서 흐물한 소똥 냄새가 끼쳤다. 뜨겁게 달아오른 푸세식 변소에선 구더기들이 똥 물에서 신나게 꿈틀거릴 것이다. 그런데, 참, 할 일이 없다. 순남이 집에나 가볼까.
순남이는 윗동네에 살았다. 우리 집에서 걸으면 삼 십 분이 걸렸다. 그래도 순남이는 동생 필남이랑 학교까지 걸어 다녔다. 2.5km. 왕복 5km를 걸어 다녔던 이유는, 그 동네까지 버스가 가지 않아서다. 버스를 타려면 우리 동네 신작로까지 와야했고 30분은 족히 걸렸다. 몇 분 차이로 버스를 놓치는 일이 많았다. 그럴 바엔 아예 걸어 다니겠다고 작정한 건지, 그들은 대부분 버스를 타지 않았다.
집에서 순남이네까지 가려면 오르막길이라서 더뎠다. 그래도 내겐 자전거가 있었다. 할 일도 없고,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나갔다. 세찬 남강을 보며 다리를 건너고, 오르막에서는 자전거를 밀었다. 바람 한 점 없다. 땀이 났다. 괜히 왔나. 꾸역꾸역 자전거를 밀어 느티나무 앞에 오르자 겨우 그늘에 앉을 수 있었다.
그 동네에는 내 또래 아이들이 있었다. 정순이네도 동생이 두 명, 순남이네도 그 집 장녀까지 합치면 자식이 넷이었다. 그리고 또 운이 좋으면 모르는 다른 아이들도 함께 어울려 놀 수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 앉아 있으니, 매미 소리만 크고 동네는 조용하다.
기척 없는 여름 한 낮, 왠지 불길했다. 순남이네는 양식으로 개조한 우리 집과는 달리, 마루에 니스칠도 하지 않은 거친 나무 마루를 가진 옛날 집에 살았다. 섬돌이 높아 오르려면 높은 돌계단을 올라야 했다. 마루 위에 앉으면 마을 전체가 내려다 보였고, 우리 동네 끄트머리가 보일락 말락 했다. 골목길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보이고 들렸다.
순남아. 순남아.
한참 반응이 없다. 집에 가려고 몸을 돌릴 때, 어. 하고 순남이가 눈을 비비고 나왔다. 희고 보조개가 예쁜순남이는, 셋째 딸로 잦은 집안 심부름을 하면서도 여동생을 어디든 데리고 다녔다. 이름처럼 순했는데, 엄마나 언니가 심부름을 시키면 표정하나 일그러지지 않고 바로 네하고 대답했다. 나라면 얼굴을 찌푸리거나 못 들은 척했을 텐데 순남이가 그런 걸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날은 그 집 장손인 순남이 오빠가 없었다. 내 오빠와는 달리, 여동생들과 놀았던 그와는 냇가에서 돌을 던지거나 산소 잔디를 타는 등의 재밌는 놀이를 했는데, 더워서 그런지 다른 아이들의 그림자도 다 숨어버렸다. 역시나 운수가 사나웠다.
할 수 없이, 순남이와 필남이와 동네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구경했지만 더위 때문에 그냥 푹 처졌다. 일찍 저녁을 먹는다는 말에 나는 집에 돌아가겠다고 자전거를 끌고 나왔다. 그 동네에서는 모르는 개가 사납게 짖었다. 개가 나올까. 아니면 모르는 동네 아저씨들이 의심스럽게 나를 쳐다볼까. 긴장하며 다시 마을 입구 느티나무까지 나오자, 아까 힘겹게 올랐던 길이 이제 내리막이 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동네가 훤히 내다보였다.
하루의 고개를 넘긴 시간. 이상하게도, 이 무렵이면 집에 돌아가야 할 것처럼 불안해지거나 깊은 낮잠에서도 눈이 떠졌다. 꼭 누가 나를 깨우는 것처럼. 나는 그게 엄마 뱃속에 있을 때부터라고 믿는다. 엄마가 이 시간 때면 농사일을 제쳐놓고 서둘러 집에 가서 저녁을 한다고 분주했을 수도 있다. 그 분주함과 불안이 내게도 스며든 것이라고.
집에 가는 시간은 5분밖에 안 걸리겠지? 자전거에 가볍게 올라탔다. 두 다리를 벌려 중심을 잡았다. 핸들을 꼭 잡고 발을 굴렸다.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자전거는 갑자기 무서울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아 그래, 브레이크,,, 그리고 다리, 아 어떡하지? 아 모르겠다. 머리가 흔들리고 이가 서로 부딪쳤다. 차체가 덜컹거리며 고속으로 굴러갔다. 눈을 살짝 감았다.
나는,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한 바퀴를 돌았을까, 일초 간 정신이 새하얬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나는 철퍼덕 시멘트 바닥에 떨어졌다. 흰 스타킹에 붉은 피가 서서히 번지고 있었다. 아씨. 얼굴이 아프고 손바닥도 까졌다. 쿵쿵쿵, 부딪친 무릎에 심장이 달린 것처럼 뛰었다. 엉엉하고 울었다.
다행히 아무도 못 보았다. 그래서 나는 울음을 그치고 훌쩍거리며 일어섰다. 자전거를 세차게 발로 찼다. 이런 멍청이. 자전거를 버려두고 한 발자국 가다가, 다시 돌아와 축이 비틀린 핸들을 치켜세웠다. 그 고통과 어스름, 그리고 나만 있었다. 다른 모든 것은 멀었다. 친구네도 우리 집도 너무 멀리 떨어져, 덩그러니 내팽겨진 것 같았다. 동네 지붕들은 주황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졸리고 배는 고프고, 스타킹이 마르면서 상처에 쩍쩍 달라붙었다. 괜히, 놀러는 나와가지고. 나는 식식거리며 집으로 돌아왔고, 지쳐서 저녁밥도 먹지 않은 채 그대로 잠이 들었다.
그러고 난 후에도 나는 계속 자전거를 탔다. 하지만 속도가 붙어 덜컹거리는 순간마다, 나만 아는 그 기억 한 조각이 불쑥 떠올라 나를 위협했다. 트라우마나 각인된 감정은 이렇게 나를 언제라도 움찔하게 만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