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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테이프

by 원더혜숙


예전에는 같은 노래를 여러 번 들었다. 질려도 귀가 아니라 입과 고개가 리듬을 따라갈 정도로,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들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별로 없다. 삶의 템포가 빨라서일까.

아이를 데리러 가는 길. 라디오에서는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온다. 프레스토같은 내 수요일을 안단테로 바꿔주는 이 노래는 Now 몇 집에 수록된 곡이다.(아직 제목을 모르겠다.) 좋아하는 많은 곡 들 사이에 있던 이 곡은 빨리 감기가 귀찮거나 무슨 일을 할 때면 어김없이 흘러나왔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불규칙한 이 노래를 미국인들은 왜 좋아하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듣고 들었다. 그리고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내게, 그 시간을 맞추는 추억의 주파수가 된다.

지직거리며 동그란 다이얼을 섬세하게 맞추면 할머니의 솔 담배 연기가 퍼졌다. 할머니 방문을 열면 바로 맞은편에 내 책상이 놓여있었다. 창가여서 밝았지만 옛날 집이 그렇듯이 외풍이 대단했다. 하여간 코딱지만 한 구석은 내 것이었다. 책장에는 내 책과 테이프, 귀한 것들을 모두 정리했다. 오빠들에게 없는 책상이 내게는 있다는 게 좀 우쭐했었다. 거기 앉아 실버 안테나를 올릴 수 있는 작은 카세트가가 있었다. 그걸로 팝송을 듣고 또 들었다.

딱 그 시기 중학교 1, 2학년 어느 여름날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아직도 마루에 새시를 달지 않은 옛날 식이었다. 안방에서 엎드려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어떤 여자가 우리 집 큰 마당을 가로질러 들어왔다. 물끄러미 쳐다보는 나를 보며 섬돌에서 물었다.

“공부하고 있었구나. 엄마는 어디 계시니?”

여자의 화장이 진했다. 정장 치마에 블라우스를 입었다. 피부 결이 보이지 않는 화장을 보자 화장 내가 훅 끼치는 것 같았다. 화장을 잘 안 하지 않았다. 화장한 여자가 나는 신기해서 계속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전화에서도, 방문객이 와도 늘 부모님을 찾았지, 나와 이야기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내가 뭘 알겠나. 나는 뭘 몰라도 하나에 꽂히면 끝까지 밀고 가는 여중생이었다.

마당에 나가 담장 너머 산 만디에 엄마가 있을까, 아님 외딴 집 너머에 양파 논에 엄마가 있을까. 잘 모르겠다. 아니 귀찮아서, 모르겠는데요. 했는지 모르겠다.

여자는 나를 두고 작업을 시작했다.

“영어 공부가 어려워? 영어는 단어는 기본이고 발음이 중요한데, 그걸 이런 교재…” 여자는 큰 가방에서 교재를 꺼냈다. 교과서와는 다른 작은 책에 영어가 쓰여있었다. 여자는 잘 만든 교재와 충분한 듣기 교재를 조합하면 영어를 쉽게 효과적으로 배울 수 있다고 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델몬트 오렌지주스 상자 모양의 묵직한 무언가를 꺼냈다. 그 안에는 테이프가 빼곡히 들어 있었다. 여자는 한 개 꺼내더니, "여기는 원어민의 영어 발음이 녹음되어 있어. 이걸 들으며 공부하면 진짜 영어를 잘할 수 있을걸."

여자의 말을 들으니 금방이라도 그 책의 영어를 다 외우고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차올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여자는 이러 저러한 가격에, 선물까지 준다고 했다. 그 선물이 뭔질 기억나진 않지만, 이렇게 예쁘게 차려입은 아줌마가 좋은 영어 교재를 이렇게 싼 가격으로, 게다가 선물까지 주면서 판다는 게 마음이 홀딱 빠졌다.

엄마가 없는 우리 집에서 한참 이야기하던 여자가 짐을 다 싸고 돌아가려고 하던 참이었다. 일이 성사되려고 했던 건지 엄마는 흰 장화에 진흙을 잔뜩 묻히고 마루에 올라섰다. 그리고 팔 토시를 하나씩 벗으며 이 낯선 여자가 누군지 아래 위로 훑었다.

나는 엄마에게 찰싹 붙었다. 달큼한 땀 냄새가, 축축한 흙냄새가 엄마에게서 났다.

“엄마, 있잖아. 나 영어 잘 하고 싶어. 나 이거 사줘.”

새참을 가지러 들어온 엄마는 딸이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어서 본다. 여자는 기회를 잡았다.

“어머니, 저희가 새 상품을 개발했거든요. 쉽고 재미나게 영어를 배울 수 있어요.”

엄마는 어머니,라는 호칭이 어색해했는데, 새로운 것이라는 말에는 호기심이 일었다.

이만코 저만코, 여자는 내게 했던 것처럼 여러 가지 장점들을 늘어놓았다.

엄마는 바빠서, 그리고 이 대화를 끝내겠다는 마음에 일단 가격부터 물었다. 가격을 들은 엄마는 오매, 혀를 날름 내고는 나를 한번 봤다.

“엄두가 안 나네요.”

여자는 할부로도 구입할 수 있다고 알려준다. 그럴 경우에,,,라고 온갖 숫자가 그녀 입에서 나온다. 나도 혼란스럽고 엄마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나는 엄마를 반짝이는 눈으로 쳐다본다.

“엄마 사 줘, 공부 열심히 할게.”라는 내 말에 엄마는 더 이상 일을 지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아이고 참, 새참 가지러 온다는 게. 그럼, 주세요.”

그렇게 말해놓고도 엄마는 석연치 않은 것 같았다. 너무 비쌌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이템플라는 학습지도 신청했고, 수능학원에도 나를 꼬박꼬박 보냈다. 그리고 교재라면, 무엇이든 사줬다. 새 쫄티를 사고 싶어도, 교재비라고 둘러대면 사주지 않았던가.

결국엔 나는 그 묵직한 테이프 상자를 책상에 진열했다. 물론 앞의 몇 개는 호기심이 생겨서 들었다. 그런데, 팝송에 비해 싱거웠다. 반복하는 영어 단어를 듣고 있다가, 그 옆에 내 뿔 인형을 보거나 마당에 내리쬐는 햇살을 보다가, 음메 소가 밥 달라는 소리가 들렸다. 영어 테이프와 교재는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다가 부수케에 들어가는 운명을 맞았다. 같은 테이프라도 하나는 끝까지 제 몫을 다했고. 하나는 고귀하지만 무용하게 있다가 불구덩이에 사그러져 가는 게 좀 씁쓸하지 않나.


이렇게 기억을 떠올리고 보니, 엄마가 내게 많은 투자를 했다. 내 책상이 따로 있었고, 교재도 있었고 영어 테이프도 사줬다 교재비라면 무엇이든 사주던 엄마가 이제서야 생각나는 건, 내가 몹쓸 년이어서가 아니라. 우리 기억은 편향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기억하게 되는 것은 실제로 본 것과 언제나 똑같지 않은 법이다.”<센스 오브 엔딩>라고 한다. 글을 쓰면 그런 기억을 살릴 수 있다. 다시 같은 내용을 쓰면 픽션과 현실이 섞이기 시작하면서 마치 내가 원하는 모든 것들을 모두 넣은 환상의 나라를 만들 수도 있다.

지금은 없어진 영어 테이프 교재, 그게 아니라 나중에 중국에서 몇 권의 문법책으로 열심히 공부하고 나서, 드디어 영어 문맹을 벗어날 수 있었는데, 영어 공부에서 교재보다 적절한 타이밍이 더 중요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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