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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 보니 생각보다 낯선 세상

by 원더혜숙

되풀이되는 매일, 어제 했던 일을 오늘과 내일모레도 한다. 지겹다. 나날이 언덕으로 바위를 올리는 시지프스처럼, 나는 해야 할 일을 꾸역꾸역 해낸다. 평소 습관대로. 기계적이다. 신선함이 있을 수 없다. 구린 내가 난다.


남편을 데리고 커피를 마시러 갔다. 친구와 갔던 트렌디한 커피숍 두 곳이 폐업했다. 시골에는 이런 상점들이 많아지고 있다. 스러져가는 것들은 크나 작으나 늙으나 어리나 전부 슬프다. 사라지지 않았으면. 자주 안 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문을 닫는 건, 낮잠을 자고 일어났는데 해가 저물어버려 허망해진 것과 같다.


도서관 옆의 커피숍에 갔다. 집에서 마시는 것만큼 신속하지 않다. 주문하는데 이십 분이 더 걸렸는데, 얼른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조금만 더 늦어지면 호박마차로 변해버리고 내 드레스는 누더기로 변해버린다. 진실을 말하자면, 카페인 때문에 오늘 잠을 설칠 것이다. 잠에 못 들어 눈을 질끈 감고 잠신이 오기를 비나이다 할 것이다.


커피를 홀짝이며 소설을 썼다. 거기는 장애인들이 서빙을 본다. 한 청년이 내게 다가와 어물거리며, 지금 쓰는 언어는 무슨 언어냐고 물었다. 한국어예요. 여기서 공부하시나 봐요? 아니, 저는 가정 주부고, 사실은 제가 소설을 쓴답니다. 아, 책을 쓰시는군요. 내가 글 쓰는 사람이라고 알리고는 뿌듯했다. 그리고 오늘은 특히 차오르는 영감을 받아 이것저것 쓰고, 책도 읽었다.


달리기도 하고 명상도 하고, 또 요가 동작도 혼자 하고, 빨래도 정리하고 이것저것으로 바빴는데도 오후가 되어도 그 생동력은 여전했다. 카페인 효력인 게 분명했다. 아이가 학원에 가 있을 동안 클레어 키건의 <푸른 들판을 걷다>와 김승옥 <무진기행>을 읽고, 어스름이 내린 길을 걸었다.


작은 도시에 차량이 부쩍 늘어난 것 같다. 커브를 돌며 인도를 겁 없이 물고 들어오는 승합차에게 괜히 성이 났다. 길이 너무 좁아서 그렇겠지. 내가 운전할 때는 좀 더 크게 돌아야겠다 생각하고. 브렌츠 강으로 가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이 볼품없는 도시에서 뭘 걷나. 나도 모르게 불평이 튀어나온다.


코앞의 잡화점의 쇼윈도를 구경했다. 회색 샐러드 볼이 마음에 드는데… 45유로. 아마존으로 살까. 다음은 약국이다. 가족 모두가 먹을 수 있는 멀티 비타민이다. 세상에, 젤리 영양제 하나로 모든 영양소가 채워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옆에는 눈 영양제, 눈 수분 보충제가 있다. 약국은 우리 몸에 문제 있는 걸 어떻게 다 알고 이렇게 설득력 혹하는 광고를 하는 것일까.


프린트 숍에는 제본 책과 진짜 책도 프린트해주고 있었다. ‘내 책도 여기서 하면 어떨까?’ 그러다가 더 걸어간다. 버스가 커브를 돌면서 관목 유럽 서나무를 들이박듯이 돌았다. 버스 정류장에 들어가는 버스들은 급했다. 저렇게 길고 큰 버스가 잘못 핸들을 꺾는다면 사상 피해가 엄청나겠다고 몸서리를 쳤다. 그 옆에는 법원이 있었다. 우리 도시에도 법원이 있었다. 십 일 년 이곳에 살면서 몰랐다니!


나는 떠나고 싶었다. 몸이 근질근질했다. 새로운 환경에서 낯선 기분으로 그 분주해지는 걸 어떨까. 새 도시로 이사한 케냐 친구의 마음을 알 것 같으면서도, 그 쓸데없이 바쁜 하루의 이면도 떠오른다. 삶은 자주 귀찮다. 한 곳에 오래 살아도 모르는 곳이 있다니 참 신기하다. 구석구석 알고 있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아마도 나는 이 도시를 샅샅이 알지 못해서 여기서 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차비를 컨트롤하는 직원이 손전등으로 차 앞의 주차 요금표를 살펴보고 있다. 한번 걸리면 25유로. 나는 시간에 맞춰 잘 지불했다.


앞으로 걷는다. 장딴지에 청바지가 닿을 때마다 냉기가 느껴졌다. 신호등을 기다리며, 저 멀리 바라보니, 신문사에 불이 켜져 있다. 커피 머신이 잘 작동하고 있는지 알아보려고 들어가려는데 셔터가 내려져 있다. 외국어 학원 앞에서 여자들이 담배를 피우고 수다를 떨고 있다. 가로등에 세워둔 자전거, 자물쇠를 푸는 여자, 저렇게 오랫동안 수그리면 피가 쏠리는 느낌이 든다. 쇼핑몰에 들어가 그냥 쓸데없이 여행사의 여행 패키지를 들여다봤다. 두바이 1200유로. 스페인은 없다.


새로 들어온 남성 의류 전문점, 그 옆에 치보. 요가 방석이 25유로. 네이비 색이 참으로 예쁘다. 명상 방석이라고 적혀 있는 게 더 마음에 들어온다. 그리고, 쇼핑몰을 나와 급하게 주차해 둔 곳으로 뛴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늦고 싶지 않다. 아이를 기다리게 하는 것보다 내가 기다리는 게 낫다.


짧게 걸으면서 상쾌해졌다. 볼 것 없는 도시에 내가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이 보잘것없는 세상이 나를 일상에서 꺼내고, 보잘것없는 물건들을 새롭게 눈 띄게 해 줬다. 생각에서 벗어나 현실을 거닐어야 하는 이유다. 결국, 세상은 생각보다 재미있다. 내 마음이 무료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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