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스민 향기가 날리던 그날 저녁

첫 키스의 기억

by 원더혜숙

이틀 동안 비가 내렸다. 앞 산이 심상치 않다. 나무는 빗물을 마시고, 푸른 옷으로 갈아입었고, 넘실댔다. 잔디도 푸르러졌고, 자두나무 잎도 짙어졌다. 정원을 채웠던 노란 민들레는 홀연 추워진 탓에 홀씨로 변신했다. 산이 나를 불렀지만 버텼다. 급할 것도 없지 않은가.


결국 등산화에 끈을 묶었다. 옆 집 할머니 집에는 튤립이 거창했는데, 이제는 푸른 안개꽃이 가득이다. 울타리를 굽어보면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게 감사하다. 여전히 속을 드러내고 있는 왼쪽 집은 시멘트로 땜질을 해 놨다. 뭔가 진전되고 있다. 빵 공장 뒷골목은 아스팔트 길 밑으로 나무뿌리가 자라 길이 울룩불룩하다. 원래도 좁았던 길이 그단새 자란 나뭇잎 때문에 왼쪽으로 붙어서 걸어야 한다. 왼쪽으로 남의 집 정원도 훔쳐볼 수 있었는데, 그 재미도 물 건너갔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정원에 아이들이 없다. 까만 튤립은 지고 노란 새 튤립이 들어섰고 모란꽃이 피기 직전이다. 사과나무와 체리나무 꽃이 다 졌다. 칸트 길을 지나는데 차고 창문에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드르륵 드릴 소리가 난다. 소일거리라도 찾아서 뭔가를 고치고 있겠지. 아닌 게 아니라 사회적 격리가 있은 후 어떤 집은 창문틀을 새로 칠했고, 어떤 집은 정원에 높은 화단이 생기고, 어떤 집은 몇 해 방치했던 나무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겹벚꽃의 향기는 그제보다 덜하다. 도로 구석에 떨어진 꽃잎이 줄지어 꽃 길을 만들었다. 놀이터에 민들레 홀씨가 몽실하게 떴다. 입에 한껏 바람을 넣고 후, 불면 다 날아가겠지. 그럼 너도 나도 봄이면 노란 민들레 때문에 골치를 썩히겠지. 산은 연초록빛이다. 이제 6미터가 넘는 나뭇가지에도 나뭇잎이 가득하다. 나무 이파리가 자갈길을 가볍게 감싸 안았다. 길에서 겹겹이 친 나뭇잎 사이로 언덕 너머 산길이 숨었다.



꽃 향기가 났다. 새 크레파스를 열면 나는 향기다. 하얀 꽃잎에 핑크빛 꽃밥이 촘촘히 박혔다. 손가락 끝에 대어보니 융모처럼 오돌토돌하다. 꽃 향기가 코끝에 스치면 그날이 생각난다. 그와 학교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어스름 녘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그가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다. “나 말할 게 있는데,,”

일주일 전이었다. 친구 한 명이랑 그 애가 관심 가는 남자랑, 나와 그가 영화관에 갔다. 영화를 한참 보고 있는데, 문득 이 사람의 손을 잡고 싶었다. 살포시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렸다. 보드랍고 따뜻했다. 그도 손을 빼지 않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손을 놓지 않았고, 함께 기숙사 앞 대문까지 갔다. 그가 폼을 잡기 전에 “잘 자” 하고 문으로 쏙 들어갔다. 사귀자는 말도 안 했는데, 그런 분위기를 잡으면 안 되지.


벤치에 앉을 순간부터 뭔가를 이야기하려는 이 남자의 의중을 꿰고 있었다. ‘나 되게 부끄러운 사람이야.’ 그가 어색하게 웃었다. ‘말해봐.’ ‘뽀뽀해도 될까?’ 음악 학원에서 피아노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양치질 안 했는데..” 자전거를 탄 학생들이 여럿이 지나간다. “어 그래, 그럼 양치질하고 다시 올까?’ 테니스장에서 공이 튀겼다. ‘근데 너 그거 알아? 한국에서는 백일 전에 그러면 안 되는 거’. 나는 벌써 멀리 갔다. 첫 만남부터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었던 걸 돌아보면, 이런 앞서 간 상상은 아무것도 아니다. “괜찮아, 그게 전부는 아니잖아.” 기숙사로 이어진 좁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자스민 향기가 스쳤다. 모리화. 향기와 나뭇잎이 그의 머리 위에 걸쳤다. 그가 나를 안았다. 포근했다. 그는 진심을 담아, 새처럼 부드럽게 입맞춤했다.


풀은 가랑비를 먹어 더 이상 바스락거리지 않는다. 비 온 후에 산들거리는 바람에 나뭇잎이 고요히 팔랑거렸다. 도시를 지나는 기차 소리가 산 중턱까지 울렸다. 저만큼 늑대 같은 검은 개 한 마리가 지나갔다. 앞에 주인을 따라가는 거겠지. 앞으로 나아갔다. 썩은 나무 두 그루가 서로를 의지하며 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어린잎 한 개도 붙이지 않고, 까맣고 하얗게 타버렸다. 오른쪽 언덕에는 개와 사람의 흔적이 없다. 숲에 들어갔을 거야. 저만치 중년 여자가 ‘하늘과 동굴’에서 나왔다. 산길보다 약간 높고, 절벽 바위가 있는 곳이다. 검은 바지, 검은 재킷에 젊었을 때 금발이었을 회색 머리칼이다. 개 주인임이 틀림없다. 숲길에는 허리가 가녀린 나무가 아치를 이루며 길을 가로막았다. 저렇게 가녀린데 어떻게 길게 자랐을까? 의지가 대단하다. 걸음을 늦췄다. 가만 보니 숲에서 자라고 있는 나무는 품종이 서 너 개다. 플라타너스 잎을 가진 놈과 참나무 잎을 가진 두 종류다. 풀도 뿌리잎은 비슷하다고 하는데, 나뭇잎도 처음 돋아날 때는 도진개진이구나.


영원할 줄 알았던 하얀 바람꽃이 자취를 감췄다. 어디 갔을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바람꽃을 발견했다. 비에 젖은 휴지 마냥 늘어진 게 처량했다. 가랑비에 지쳐서다. 햇빛이 없으면 너희들도 기분이 처지는 구나. 꽃잎 목덜미는 흰색 바탕에 핑크빛이 돌았다. 바람꽃이 발목까지 높이로 해서 천지였는데, 다른 하얀 꽃이 등장했다. 바람꽃보다 더 작은 별 꽃 느낌이 나는 그 애들은 시들어가는 바람꽃과 다르게 찬 바람에도 고개를 빳빳이 처 들었다. 싱싱하다. 새로운 얼굴이 생기면 구관은 자연스럽게 사라져야 하는구나.


벌목한 나무 기둥탑은 여전히 길 한편을 지키고 있다. 비가 남긴 공기 물방울이 갓 벤 나무향을 그윽하게 보냈다.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여자는 걸음이 느렸다. 산속에서 검은 개가 불쑥 나와서 그녀를 보고 아는 척한다. 한참 앞서 가더니 고개를 돌려, 주인 존재를 확인했다. 여자는 축 처진 어깨만 도드라졌을 뿐, 반응이 없다. 귀룽나무 아래 장작도 나무 향기가 진하다. 이래서 비가 좋다. 향기를 진하게 만들어 주거든.


사과나무 꽃이 아직도 지지 않았다. 잔잔한 회색 빛 하늘. 전나무 가지는 오늘은 땅 아래로 가지를 늘어뜨렸다. 그래도 벌써 뾰족한 나무 잎 사이에 비엔나소시지만큼 큰 열매를 키웠다. 보이지 않아도, 자연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다. 구름에 포위당한 해를 배경으로 나무 맨 꼭대기에 묵직한 비둘기가 솟대처럼 남쪽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다음 가지에는 다른 한 마리가 그림자처럼 우두커니 같은 방향을 바라본다. 비탈을 내려오자 구구 구구하고 울었다. 연인이 옆에 있는데 왜 울지?



신록은 질리지 않는다. 초록은 황금이다. 계속 봐도 가치가 줄지 않으니. 비에 촉촉이 젖은 이파리는 기지개를 켜지 못한 듯 생기가 없다. 갑작스러운 추위에 적응을 못 했나. 그래도 촉촉해진 풀을 터전 삼아 몸을 키운, 엄지 손가락 만한 달팽이는 제 갈 길을 간다.


한 여름이 지나고 여름이 한 풀 꺾긴 계절에만 느낄 수 있는 것. '손이 시리다.' 어떤 집 현관 앞, 노란 팬지가 애써 웃었고, 마로니에 일곱 이파리는 서로 가까워졌다. 민들레 홀씨도 비를 머금었다. 날씨가 따뜻하면 사람들은 목소리를 크게 내고 밖으로 나온다. 오늘은 창문을 굳게 닫고 모두들 신록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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