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기로에 서면

가만있기보다는 모험을

by 원더혜숙

시골의 작은 학교에 진학할래? 중소도시의 큰 학교에 갈래? 큰 학교에 갈 거야.

큰 도시로 대학 갈래? 아니 촌에 머물러 있을래? 큰 도시에 가야지.

국내 있을래? 해외에 한국에서 석사를 하고 있을 때, 유학 다시 한번 갈까? 아님 여기서 공부를 마칠까? 유학 다시 한번 콜.

중국에 남을까? 아님 독일에 가 볼래? 독일에 가보자.

애들 키우고 집에서 독일어도 배우지 말고 있을까? 아니면 배울까? 배우자. 운전도 하자

말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을까? 한 마디라도 더 해서 말을 늘릴까? 한 마디쯤이야 더 할 수 있어.

직장을 찾을까? 집에서 있을까? 둘 다 해 보자.

육아로 우울증에 빠져 있을까? 일주일이라도 혼자 바람을 쐬러 갔다 올까? 당연히 친구랑 여행 갔다 가야지.


시골에서 벗어나서, 중소도시에서 연극도 보고, 답사하는 문화도 접했다. 그게 지금 이렇게 여러 곳으로 돌아다니는 자신을 만들었다. 대학교를 큰 도시에 다녀서 시골이 얼마나 작은 우물이었는지 깨달았고, 세상을 경험했다. 해외에 나가서 여러 나라의 친구들을 만나고 세계는 넓고,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다시 한번 유학을 갔을 때, 넓은 대륙을 여행하면서 아름다운 곳이 참 많다는 것을 눈으로 보았고, 또 남편을 만났다. 독일에 오기로 결정하면서 다시 한번 언어를 배워야 했지만, 배웠던 것을 다 버리고 새로운 언어와 환경에 적응하는 것이 어쩌면 나의 운명인가 여겼다. 육아로 힘들어서 어디든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운전을 시작했다. 덕분에 고속도로를 타고 생활 범위가 확장됐다. 시간적 여유가 되어서 직장을 찾으려고 동분서주했고 결과적으로 자신을 찾는 여정,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했다.


삶의 기로에 섰을 때, 마음은 역동적인 것으로 기운다. 안 하기보다 하기로 결정했고, 그 선택들이 자신을 다른 세상으로 인도한다. 삶이 고정되어 있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라기 보다, 모험과 실험을 더 선호했고, 그에 따라서 움직였다. 대단한 인생은 아니지만, 꿀리지 않는다. 선택에서 두려움을 이겨내고, 마음이 원하는 것을 따랐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많은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오겠지만, 해 왔던 것처럼, 머물기보다는 할 것을 선택하겠다. 이것이 주어진 삶에 대한 최선이 아닐까.



중학생 때, 교실 한쪽에 범우 문고 책장이 들어섰다. 인물 자서전과 처세서, 시집이 위주였다. 그중 카네기 처세서에 빠졌다. 성공 스토리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침을 알려주는 책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때가 시작이었다. 당시는 책을 비판적으로 읽는 법을 몰랐고, 그저 읽고 따라 해 봤다. 계획을 하면 꼭 실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지만, 그래도 결과를 보면 뿌듯했다. 그때부터 줄곧 그런 서적만 읽었고, 지금도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의 스토리는 가슴 깊숙한 곳에 뜨거운 희망, 열정과 동기를 끄집어낸다. 수동적이기보다는 변화를 끌어내고, 적극적인 행동을 하라고 부추긴다.


육아로 힘들 때, 손에서 떠나지 않았던 책이 있었다.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가운데, ‘안전한 길은 죽은 자의 길이다’에서 이렇게 얘기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모험의 대가로 부와 뱃사람으로서의 명예를 얻었다. … 무인도에서 죽음의 공포와 고독,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과 싸우며 진정한 살아있음의 가치를 깨달은 크루소에게 돈과 명예는 하잘것없었다. 다시 맛본 평범한 일상은 행복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다시 배에 올랐다. 그의 나이 62세였다. 위험을 알면서도 일부러 그 길을 간 로빈슨 크루소는 인간은 위험한 선택이라도 자기가 원하는 일에 전심전력할 때 존재감을 느낀다는 걸 깨달은 게 아닐까.” 서른 살엔 미처 몰랐던 것들, 김선경 26쪽

자신의 사명을 다하거나,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자신이 세상에 존재하는 의미를 알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기분 좋은 일을 자주 되풀이하고 싶다. 성장에 발걸음을 내디딜 때, 그런 것을 느낀다. 내 존재감을 증명할 수 있겠다. 나다움을 증명할 수 있겠다 하고, 불끈불끈 힘이 솟았다. 멈추지 않고 성장하는 힘은 여기서 나온다.



자기가 원하는 일에 전심전력하는 것’, 꺼림칙함이 없이 해야 할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을 때는 마음이 충만하다. 이것이 중용에서 말한 성(誠)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이(李珥)는 『논어』에 있는 충(忠)과 신(信)은『중용』에 나오는 성(誠)과 그 뜻이 다르지 않다고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충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에 대한 충실을 의미한다. 그는 “자신의 본성에 충실한 것을 충(忠)이라 하고, 마음이 진실한 것을 신(信)이라 한다. 충은 진실한 참 마음이고 신은 진실된 일이다. 사람이 충하고 신하지 못하다면 모든 일이 참되지 못하다”라는 주희(朱熹)의 말을 인용하면서 『논어』의 충신이 『중용』의 성과 그 의미가 다르지 않음을 밝힌 것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성(誠)


충(忠)은 또 한 번 성(誠)과 이어지는 개념으로, 모두 자신이 원하는 것을 발견하고, 그것을 실천해나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기실현, 자기 존재를 증명하는 것을 말한다. 어렵게는 천명을 받든다고 할 수 있다. 자기 생명의 의미를 찾는 일이 곧 충이고, 성이다.


자기 본성이 뭐냐고 물으면, 내면의 목소리가 외치는 것이다. 지금 내게는 ‘글쓰기다’, 글쓰기를 정성스럽게 하면, 이 행위가 다른 세계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면 또 거기서 최선을 다한다. 내 존재의 의미를 조금씩 바꿔가며, 그 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故至誠無息’(중용 7장) “최고의 성실함은 쉬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 듯, 자기 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 쉬지 않고 노력해야 한다. 존재의 의미는 머물지 않고 변화하고, 그것이 삶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성장에 집중하는 것이다.


안전과 모험의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모험을 선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삶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안 해보면 모른다. 그 흔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말처럼, 인간은 사물을 만났을 때 작용이 일어나고 그전과 그 후에 자아는 어떤 식으로든 변화하게 되어있다. 세계와 만나지 않고, 어떤 상황에 처하지 않고 우리는 어떤 변화도 겪을 수 없고, 성장도 없다. 따라서 가만히 있기보다 모험을 선택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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