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을 떼 놓고 떠나는 두번째 여행, 목적지는 스페인이다. 출산에서 몸은 회복했고, 조깅으로 최상의 체력을 자랑했다. 인근 도시 클럽에 가서 바네사랑 춤도 췄고, ‘여자들의 밤’이라는 이름으로 엄마들끼리 어울려 술도 마시고, 시간 날때마다 다양한 친구들과 커피타임을 가졌다. 삶은 그래도 지루했다.
바로셀로나 클럽에서 춤도 추고, 낯선 이들과 맛있는 타파스를 곁들어 달콤한 샹그릴라에 취할까.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만나는 사람마다 바르셀로나 클럽에 간다고 자랑과 흥분을 늘어 놓았는데, 늦바람이 그렇게 무서운 거다. 한국에서도 가끔 밤문화를 즐기고 싶으면 누군가를 따라서 클럽을 가고, 일본에서도 유학생들이랑 어울려서 클럽에서 밤을 꼴딱 센 적도 두 번 있었고, 중국에서도 클럽에서 밴드를 했던 남자친구를 따라서 여러 번 같지만, 스페인은 더 자유롭고 좋을 것 같은 느낌은 베프 바네사 영향이었을까. 그녀는 누구에게도 오픈하니깐.
친구는 싱가포르에서 중이염이 걸려서 취리히에 하루 늦게 도착했다. 취리히 구경도 제대로 못했는데, 바로셀로나까지 항공권도 재구매해야 했다. 운이 나빴다. 우리는 뷔에링 항공사를 이용해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바르셀로나가 스위스보다 훨씬 따뜻했다.
짐은 많지 않았다. 하늘색 칸켄 가방 하나와 까만 샘소 나이트 하드 슈트 케이스 하나.
무빙 밸트 앞에서 짐을 기다렸다. 친구의 짐이 먼저 받고, 미끌어져 가는 내 슈트케이스를 번쩍 들었다. 가볍다… … 잠긴 슈트케이스 사이에 하얀 종이조각이 삐쳐 나와 있다. 본능적으로 내용물을 확인하고 싶었다. 안 열렸다. 비밀번호 설정을 따로 안 해 놨는데 … … 혹시 몰라서 급하게 남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남편은 아이들과 치열한 육아를 보내고 있을 터. 20분 후, 비번을 받아서 다시 시도했다. 아무래도 안 열린다. 가방의 바코드와 항공권의 바코드를 비교했다.
아차, 남의 것이다.
급히 항공사 직원을 찾았다. 다행히 인상이 좋아 보이는 젊은 남자.
혹시 그가 내 영어를 못 알아들을까봐 아주 천천히 또박또박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소리가 떨렸다. 직원은 별 대수롭지 않은 듯,, 스페인어로 다른 직원에게 연락을 했다.
내 인적사항을 간단히 적었다. 찾을 경우 택배로 가방을 호텔까지 보내준다고.
불길한 느낌은 없었다. 다만 곰곰이 생각했다. 혹시라도 가방을 가져간 놈이 가방을 열었으면 어떡하지? 귀중한 물건은 가방에 다 넣었고 돈이 될 만한 건 없었다. 그걸 왜 가져갔을까, 분명히 자기 꺼보다 무거웠을텐데…. 나도 내 가방인 줄 하고 덜컥 집었지 않는가. 자기 가방을 알아보지도 못한 이 사람은 도대체 뭔가? 내 가방은 보편화된 브랜드에 베이직 모델이다. 구분이 안 갈 만도 하다.
화장품, 갈아입을 옷, 파자마가 여행가방에 들어있었다. 파자마는 그날 저녁에, 화장품과 다음날 입을 티셔츠는 친구에게서 빌렸다. 그럼 속옷은 어떡하지? 친구에게 빌릴 수도 없고… … 1분 고민 끝에 뒤집었다.
친구의 옷을 입은 나는, 타파스도 먹고 샹그릴라도 마시고 구경도 실컷 했지만 꿈 속에서 그리던 바로셀로나를 걸으면서도 마음은 딴 데 있었다. 돌아온다고 믿었지만 가방이 돌아오기 전까지, 친구 티셔츠를 볼 때마다, 속옷을 거꾸로 입었다고 인식할 때마다 불쑥 검은 것들이 기어올랐다. 이틀째 친구의 파자마를 입고 잠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호텔에 여행가방이 도착했다. 기뻤다. 그리고 가방을 요모조모 살폈다. 군데 군데 스크래치가 나 있었고, 까만 슈트 케이스 자물쇠 가까이 플라스틱 표면이 하얗게 일어나 있었다. 칼로 열려고 했던 흔적이 틀림없다.
가방을 열려고 한 것인가. 그것도 뾰족한 것으로 적극적으로 열려고 했단 말인가. 태그를 확인하면 자기 것이 아닌 것을 알았을텐데. 가방을 바꿔치기 한 사람은 코스타리카 리퍼블릭 출신이라고 했다. 가방이 열리면 돈도 안 되는 옷가지를 훔쳐갈 생각이었을까.
가방이 온전하지 않은 점, 여행에 불편을 겪은 점으로 보상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그런 따지는 불편함을 감수하면 보상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치밀하지도 예민하지도 않다. 더욱이 귀찮았다. 팬티를 사면 될 걸, 순식간에 뒤집어 입은 것처럼 대충 넘길 수 있었다. 게다가 남편이 자기 출장 슈트케이스에 스크래치 났다고 불평도 하지 않을 것이다. 가방이 돌아온 것만으로 다행이었고, 아무 것도 도둑맞지 않아서, 하루만에 돌아온 것이, 그 여행객이 다른 국가나 도시로 빠져나가지 않은 게 럭키였다.
없어진 물건은 없었다. 자기 가방이랑 내 가방이랑 같아서 엉겁결에 들고 튀었을 것. 그렇지 않으면 그것을 가져갈 이유도 없고, 훔칠 의도였다면 가방을 손상시켜서라도 물건을 꺼냈을 거다. 결과적으로 돌려주지도 않았을 거다. 대운이 좋았다. 그들은 조금만 생각해보면 가방을 열었을지도 모른다.
비밀번호는 0000이었으니깐.
깨끗한 속옷으로 갈아입고 산뜻하게 사그라다파밀리아성당, 구엘파크, 카사밀라까지 구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