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도 인연이 닿아야 만날 수 있다. 사 놓기만 한 책, 읽다가 말았던 책이 어쩌다 책장을 들쳐보다가, 누군가가 추천해서 새롭고 큰 의미로 다가올 때, 보이지 않는 인연을 실감한다. 독서도 인연이 닿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지 모르겠다.
<모모> <해리포터>를 독일어로 완독하는 데까지 꽤 오래 걸렸다. 영어원서 <아티스트웨이>를 구석구석 읽고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고 푹 빠지기까지, <타이탄의 도구들>의 진가를 맛보기까지는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다시, 독어 원서로 <나의 인생>을 읽고 있다. 700쪽이라는 분량에 더해, 한 세기를 넘나드는 역사에서 한 개인의 삶의 변화를 보여주는 자서전이라 모르는 단어가 한 페이지에 20개 이상 있다. 모르는 단어도 단어이지만, 긴 문장은 묵독으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국문판을 동시에 읽고, 직접 해석하기도 하면서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가는 중이다.
그동안 영어와 독일어 원서를 읽으면서 쌓인 노하우를 공유하겠다.
1. 초벌 읽기
저번 포스팅에서는 읽고 싶은 원서(혹은 국문 책이라도 좋다)를 침대 맡에 두는 습관을 팁을 소개했다. 정말 읽기 싫은데 하루하루 읽어가다 보면 사흘째 되는 날은 진도가 첫 둘째 날보다 훨씬 잘 나간다. 가속도가 붙은 것이다. 그 여세를 몰아 끝까지 읽으면 순항이다.
원서 읽기 습관이 붙었다면, 가장 중요한 것은 완독이다.
초벌 읽기로 완독하자. 어차피 이해 안 되면 여러 번 읽으면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여유를 가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충이라도 좋으나 페이지 페이지마다 눈 마주침을 하자. 초벌 읽기는 내용 이해보다 전체 내용 파악이 목적이다. 소설이면, 어떤 스토리인지, 어떤 개념들로 채워져 있는지, 주제가 뭔지는 초벌 읽기로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목차, 표지 문구, 책 소개도 훑어보자.
단어를 모르더라도 상관없다.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자기 언어 습관 안에서 어떤 단어는 반복해서 쓸 수밖에 없다. 그런 단어는 간단히 찾는다. 일단 한 번 완독했다면, 그다음은 쉬워진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초벌로 한 번 읽고 나면, 눈에 들어오는 단어가 벌써 두 배로 늘어나며, 또 전체 흐름에서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도가 높아진다. 그에 따라 모르는 단어에 대한 호기심도 늘고, 뜻을 찾아보면 이해가 잘 된다. 기억력도 좋아진다.
그렇게 하고 나면 원서가 만만해 보인다. 완독했다는 성취감, 해냈다는 자신감 때문에 다음 원서는 더 두꺼운 걸로 과감하게 도전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어렵더라도 약간 도전할 수 있는 책(자신의 실력 15퍼센트 이 넘는 정도)이 좋다. 열 문장에서 다섯 개 이상 모르는 단어가 있다면 자기 수준보다 어려운 것이다. 그런데 모든 책이 첫 장부터 마지막까지 어려운 단어로 꽉 차 있지는 않다. 어떤 부분은 어렵고 어떤 부분은 쉽다. 어려운 단어가 많더라도 기죽지 말고, 꿋꿋이 그 한고비(모르는 단어가 너무 많을 때)를 넘겨보자.
2. 재독하기
원서를 처음 읽기 시작하면 어렵다. 문제는 단어, 단어를 모르면 겁이 나고 읽기도 싫으며, 책장을 넘기는 속도까지 느려진다. 잘 생각해 보면 국문으로도 생소한 분야 예를 들어 철학, 과학, 역사 관련 서적을 읽을 때는 어려워서 진도도 안 나가고, 읽고 나서도 거진 다 잊어버린다. 머리도 아프고 이해도 안 되는 걸 계속 읽고 싶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중도 포기하게 된다.
그런데 재독하면 초벌 읽기에서 몰랐던 단어에서 멈추더라도 이해가 더 잘 된다.
시간이 지나서 어휘력이 늘어났을까? 약간은 그렇지만, 그것보다 초벌 읽기로 전체 흐름을 이해해서 대충 어떤 내용일 거란 추측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벌 읽기가 중요하다.
단어를 많이 알면 알수록 어휘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이해력도 좋고 이해하면 재미도 생겨서 꾸준히 읽을 수 있다.
알고 있는 어휘는 한정적이고, 원서를 읽으면 새 단어가 끊임없이 출현한다. 어떻게 새 단어를 익힐까?
·중요한 단어는 문맥에서 익힌다.
단어를 익힐 때는 문장에서 문맥에서 익히는 게 기억에 오래 남는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문맥에서 단어의 뜻을 추측한다. 생각보다 제대로 하고 있는 사람이 드물다. 제대로 해보자. 문맥에서 단어 뜻을 추측하고, 단어 뜻을 사전에서 찾는다. 가끔은 소리 내서 단어를 읽어본다.
요즘은 스마트폰이나 사전 앱을 사용하면 1초 만에 뜻을 찾을 수 있다. 다만, 쉽게 찾은 단어는 쉽게 잊어버리는 법, 단어를 타이핑을 할 때는 최대한 천천히 스펠을 생각하면서 적는다. 영어 단어와 독일어 단어도 긴 단어를 나눠서 생각하면 뜻과 연결해 익힐 수 있다. 예를 들어, procrastination;미루는 버릇, 꾸물거림,를 찾으면 (pro cras ti nation)으로 나눠져 있다. pro와 nation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단어고, 중간의 단어만 노력해서 기억해 주면 된다. entkommen에서도 ent과 kommen를 분리해서 보면, 벗어나다는 뜻과도 연결하기도 쉽고, 나중에 연상하기도 쉽다.
procrastination명사를 찾았다고 하면, 그 단어와 관련된 procrastinate동사를 찾아볼 때도 직접 타이핑한다. (리스트로 연결하는 한번 클릭이 쉽지만, 쉽게 기억한 것은 쉽게 잊는다.) 단어 뜻을 찾았으면, 예문 위주로 단어 뜻을 살핀다. 문맥에서 어떤 뜻이 있는지 생각해 보고, 책에서 찾는 뜻과 딱 맞는 의미인지 생각해 본다.
문맥에서 단어를 추측하기는 생각보다 어렵고, 시간이 꽤 걸리며 귀찮은 작업이다. 그래서 무척 궁금할 때,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여러 번 등장한 단어만 찾는다. 또 아무리 어휘력이 좋은 저자라고 할지라도 즐겨 쓰는 표현이 있고, 책의 키워드와 소설에서 늘 등장하는 배경을 묘사하는 표현은 반복된다. 이런 단어는 정확한 의미를 꼭 찾고 포스트잇으로 간단히 뜻을 적어 둔다. 읽으면서 모르는 단어와 좋은 부분은 색연필로 칠한다. (그래서 원서는 보통 종이책을 구매하는 편이다.) 재독할 때 눈에 띄어 반복이 용이하다.
·메타인지를 하며 천천히 읽는다.
영어와 독일어는 덩어리로 의미를 묶는 속도가 국문에 비해 처진다. 그리고 정말 그 덩어리를 이해하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문단을 읽고 나서 수시로 제대로 이해했는지 확인하자. 필요할 때는 노트에 해석을 적어본다. 그 문단이 내게 어떤 다른 깨달음을 줬는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겪을 때만 원서 읽기도 효과 있다.
덩어리, 의미 덩어리를 끊어서 읽고, 정말 그 의미를 이해했는지 확인을 한다. 문장을 읽고도 이해가 안 되면 다시 앞으로 간다. 초벌이나 재독이든 문장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넘어간다면 문단을, 챕터를 책의 핵심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이 이해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항상 메타인지를 해야 한다. 이해를 못 했다면 멈추고 앞으로 가고, 문단을 전체적으로 읽어보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자신의 말로 바꿔 본다. 잘 이해했다면 그에 대한 자기만의 생각이 생긴다. 생각을 메모까지 해보자. (중간중간에 메모하자. 끝나고 하면 망각한다.) 표시한 중요한 부분과 메모는 재독, 삼독과 사색, 독서 서평이 나 내용 정리, 발췌에도 유용하다. 한 가지 생각으로 묶으면 좋은 글도 나오고, 이런 과정을 거쳐 읽은 책은 오래 기억 남을 뿐만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하는 실행 능력도 높인다.
그런데 이런 작업은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있을 때, 즉 초벌 읽기를 하고 난 다음에 좋은 효과를 발휘한다. 영어나 독일어 원서는 기본적으로 두세 번 읽는 것이 습관이 된 이유도 그렇다. 처음에는 글만 읽다가 전체적으로 완독한 하면(이때는 내용이 궁금해서 속독을 자주 한다. 거의 눈을 스치는, 실제로 챕터의 타이틀만 읽어도 내용 파악이 가능하지만, 마음이 급해서 그냥 읽는다. ) 재독이 가장 중요하다. 비교적 쉬운 책이라면 재독을 통해서 반복되는 어휘를 익히게 되고, 또 초벌에서 안 보였던 내용이 들어온다. 이해도가 높아진다.
경험에 의하면 원서 읽기에서 초벌과 삼독에서만 속독이 가능하다. 어휘를 익히고 또 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독과 메모가 필수이며, 이때는 책 읽는 속도는 잠시 잊자. 최대한 읽고 있는 책을 소화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하자. 단어 뜻이 확실하게 떠오르고, 문장을 의미 덩어리로 쪼개서 이해하는 식으로 읽다 보면 저절로 속도가 빨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