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늦은 밤 엄마는 가요 무대를 본다고 했다. 첫 인사말을 듣고 잠결에 마지막 피날레만 보았던 그 가요 무대, 사회자 김동건 아나운서는 항상 똑 같은 인사말을 했다.
국민 여러분, 멀리 계신 재외 해외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아니, 해외에 동포가 얼마나 많길래. 그들에게까지 인사하는 걸까? 그들이 이런 구닥다리같은 가요 프로그램을 볼까?
아마, 그 때 그 시절,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기, 모국이 그립고 그 때 그 시절 그 노래가 그리웠던 사람들에게는 가요무대는 아주 귀한 프로그램이었을 것이다. 지금, 인터넷이 없다면 나도 티비에서 80년대 가요로 만든 가요 무대를 보고 있을까나…. 생각만 해도 우습다.
2019년 기준으로 세계 재외 동포 수는 749만 4천명이다. 옛날에는 전쟁과 한국의 경제 악조건으로 인한 해외 이주 사례가 많았겠지만, 지금은 자발적 선택에 의한 유학 혹은 해외 근무 파견 의 이유, 혹은 나처럼 외국인 배우자를 둬서 외국에 사는 한국인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가요 무대에서 인사받는 그런 입장되었다.
뭔가 묘하다.
한국의 뿌리를 가지고 있으나 국민 여러분에 속하지 않고 그들과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분리된 그런 해외 동포 여러분.
내게 해외 동포가 되는 것은 이런 것이다. (개인적인 견해 일뿐입니다)
1.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해외에서도 교포들과 어울리기보다는 그 나라의 외국인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외모에 별 신경을 쓸 일이 없다. 파티나 모임에 갈 때면 비비크림에 입술을 바르기는 하지만 일상에서 노메이컵을 하게 된 이유는 한국을 벗어난 이유가 크다. 다행히 독일은 그런 여자들이 많으니 화장을 안 한다고 해서 튀지 않는다. 그러다 한국에서도 화장을 안 하고 다니다가 결국엔 한마디 듣거나, 스스로 나이가 표나는 얼굴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서 비비크림이라도 바르게 된다.
2. 트랜드에 맞는 옷을 입지 못한다.
한국에 가면 항상 그 시기에 유행하는 옷이 있다. 나이가 있더라도 그런 유행에 따라서 한 개 정도의 아이템을 구매하는 것쯤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해외에 거주하면 그럴 수가 없다. 친구들을 만나면 독일에 최적화한 내 패션이 이상하게 보일 때가 많다. 그렇다고 독일 유행을 따른 것은 아닌데, 뭔가 맞지 않다. 그래서 하나 장만해서 독일로 가지고 오더라도 여기서 입으면 뭔가 더 이상하다. 그래서 한국에서 예뻐서 샀던 옷이라도 여기서는 거의 못 입는다.
3. 한국에 돌아가면 적응하는 데 시간이 필요하다.
물건 살 때 현금을 내고 있고, 포인트 적립을 안 하던다던지. 뭔가 가입할 일이 있으면 휴대폰 인증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여의치 않다.(보통은 오빠가 주는 충전폰을 쓰거나 가족의 폰을 빌린다) 또 뭔가 예약하거나 알아볼 때는 선뜻 나서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기 때문이다. 마치 외국인이 된 것처럼. 다른 도시에 갈 때도 인터넷 검색을 한참 하고서야 갈 수 있다.
카톡으로 기프트콘을 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실제로 해보는 데는 한참 걸렸다. 신문물을 받아들이는 건 한국에 있었으면 더 잘 했으리라 믿는데, 이런 걸 잘 모르고 트랜드를 따라가는 게 더딘 나는 해외 동포임에 틀림없다.
4. 한국에서 아이들과 정말 자연스럽게 독일어로 이야기하고 있을 때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쳐다본다.
일상적으로 아이들과 한국어로 하다가 아이들이 못 알아들을 것 같으면 독일어로 한다. 당연히 아이들은 독일어로 대답한다. 아주 자연스러운 이런 상황이 한국에서는 특이한 케이스로 누구의 주목을 받는다.
-엄마 쟤네 외국에서 왔나봐.
아직 영어와 독일어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여러 번 어디서 왔는지 질문받는다.
5. 한국어로 둘러싸인, 모든 걸 알아듣는 환경에 놓인 게 이상하다. 특히 공항에 도착하고 나면 버스표를 살 때, 문법 고민없이 그저 막 생각나는대로 말해도 된다. 집중하고 정신 차려야 들리던 말소리가 무심코 있어도 주위 말이 또렷이 들어오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된다. 그제서야, 아 나 여기 지금 한국이지. 실감한다.
6. 한식을 굳이 챙겨 먹지 않는다.
해외 동포는 김치, 멸치, 된장, 라면, 김밥, 떡볶이 등 성장시기에 먹었던 음식들을 안 먹고도 잘 산다. 오히려 잘게 잘게 손이 많이 가는 한식보다는 쉬운 중식(채소 볶음), 한그릇 음식으로 먹을 수 있는 태국 카레, 아이들이 좋아하는 미트볼 스파게티와 피자 등의 음식을 즐겨먹는다. 그렇게 많이 먹었고 좋아했던 음식을 한번에 안 먹은 건 아니다. 무엇보다 한식 식재료를 조달하기도 어렵고 비싸며, 만들어도 식구들이 함께 먹어주지 않으면 재미도 없지 않는가. 가끔씩 김치나 한국 음식을 좋아한다는 친구들을 만나면 나도 즐겨 먹지 않는데, 어떻게 요리해야 할지 난감하다.
7. 한국에 가는 게 여행가는 것 같다.
유학을 가고 한번씩 한국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 그래도 집으로 돌아간다는 느낌이 있었다. 포근하고 마음이 안정됐다. 그곳에서 계속 머물겠다는 생각이 주는 안락함이랄까.
이제는 친정에서 지내더라도 정해진 기간만큼 머물러야 해서 특별하고 긴장된다. 머무는 동안 안 만난 친구도 만나고 한참 못 먹은 음식들도 먹고 가보지 못한 곳에 여행도 간다. 짧은 기간동안 해 보고 싶은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모든 걸 보여줘야 한다는 마음에서 여행과도 같다. 그 여행이 끝나면 독일로 돌아와야 한다.
내 집은 한국이 아니라 독일에 있다. 나는 독일에 살기 때문에, 해외 동포들의 집은 해외에 있기 때문에 우리는 지리적, 언어, 문화적으로 한국과 멀다. 지금 사는 곳에 적응하느라 이전의 습관을 잊어버렸고 한국에 가서도 어색한 이유다.
타국살이도 쉽지 않다. 익숙한 언어와 환경을 버리고 타국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적응해야 하고, 게다가 텃새(인종차별)까지 있으니. 그래도 선택해서 외국에 살고, 터전을 마련한 이상 그곳에 살 의미를 찾고 씩씩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나 또한 그럴 것이다.
멀리 계신 재외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