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단체 야영의 추억
우리는 두 배 들떠 있었다. 학교는 여름 방학 전, 2박 3일로 용추 계곡 야영을 계획했다. 조원만 선생님이 정해주면 준비물이나 먹을 것은 전부 학생들 자율이었다. 내 생애 처음 야영, 나뿐만 아니라 시골 학교 전교생 대부분이 첫 경험이었다.
텐트, 가스버너, 매트, 침낭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텐트에 따라 조원이 재구성되기를 여러 번, 코펠 대신 냄비, 야영 랜턴 대신 플래시로 야영 구색을 갖췄다. 도착해서 텐트를 치고 밥을 해 먹은 것 같은데 밤은 찾아왔다.
야영의 꽃은 밤 축제, 레크리에이션 강사의 강요에 창피를 무릅쓰고 끼를 모아 장기자랑을 했다. 전교생이 한데 섞인 댄스파티가 한바탕 열렸다. 반짝이는 무대 조명 아래 무아지경으로 춤을 췄다.
축제의 피날레는 갓 학생회장으로 선출된 배진욱 선배가 장식하기로 했다. 엔카에서 전주가 흘렀다.
-뭐야, 왠 발라드야.
웅성이는 여자들의 목소리에 조용히 <별은 내 가슴에>의 주제곡, 안재욱이 부른 포에버를 발라드 곡 전주가 천천히 흘렀다. 나쁘지 않은 음성이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댄스의 흥분이 가라앉지 않은 학생들의 수다에 묻혔다. 하늘이 비까지 똑똑 떨어뜨렸다.
별은 내 가슴에연출이진석, 이창한출연최진실, 안재욱, 차인표, 박철, 오지명방송1997, MBC
“너의 사랑만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이유였는데,
돌아와 줘. 이제라도, 사랑할 수 있게.”
클라이맥스를 부르는 순간, 비가 후드득 후드둑 쏟아졌다. 아니 퍼부었다. 무대 설치나 다른 것들은 제쳐 두고 전교생이 전부 냅다 자기들 텐트로 뛰었다. 젖은 몸을 수건으로 말렸지만 축축했고, 탁탁타탁 텐트에서 빗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천둥이 치고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친한 친구랑 한 조가 되면 좋지만, 꼭 그럴 때는 친한 아이들을 떡 썰 듯 썰어서 떼어버리는 담임 때문에 우리는 모두 잠든 사이 널은 남순이네 텐트에서 모이기로 했다.
텐트를 나와 우산을 펼쳐 들고 물컹하게 물먹은 운동화를 구겨 신었다. 친구가 어느 조에 들었는지 어느 텐트에 있는지 빗속에서 분간이 될 리 없다. 이름을 불렀다.
-주희야, 남순아...
빗소리에 그들의 이름은 잠겼다. 몇 분을 야영장을 돌았을까. 희미하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여기라.
-어? 어디라꼬?
-여기.
텐트 지퍼를 쓰윽 열고 친구가 목소리를 낮춰 나를 불렀다.
-어, 비 오지게 오제.
-이게 다 그 뭐시고 은방울네 아들 회장때무메 아니라. 야 그 팬시집에 가서 뭐 구경할라치면 얼마나 눈치 보이는 줄 알아? 그런데 이 촌구석에서 아들이 학생회장 한다고 얼마나 뻐기고 다니던지.. 내 그 꼴 더러비시 못 봐주겠다.
-비가 진짜 많이 온다이.
-우리 텐트 칠 때 빗물 받이 수로 깊게 판 것 같은데 바닥에 물이 흥건한 것 같애. 춥기도 춥고.
-그게 다 비 몰고 다니는 교장하고 학생회장 때문 아니라.
-아까, 근데 진짜 웃기더라. 한참 노래 부르고 높은 데서 삑싸리 딱 날라카이.. 우르루 쾅쾅 했잖아.
-선배들도 큭큭거리고 웃던데.
-하늘도 그 노래 그만하라고 하는 지시였지 뭐꼬.
남순이네 텐트에는 다른 친한 친구가 있는 조원들은 다른 텐트에 갔고, 대신에 주희와 한나가 벌써 와 있었다.
-그래도 잘 보면 진욱 선배 잘 생겼는데.
한나가 한마디 했다.
-야는 뭐 선배라카면 다 잘 생겼대. 네 남친 희민이나 잘 관리하고. 이제 모일 사람은 다 모였으니깐 놀아볼까?
-영숙아 준비한 거 꺼내 봐.
주희는 공부는 못해도 잘 치고 잘 뺐다. 영숙이는 주희와 같은 조에 그 텐트의 주인이었다. 널은 텐트를 제공하는 것만으로 고마운데, 그녀는 캔 맥주까지 짊어지고 왔다.
-가방 조사할 때 가슴이 조마조마했데이. 돌광이가 이번에는 검사 대충해서 그나마 몇 개는 건졌어.
영숙이는 가방에서 맥주 캔 세 개와 과자 몇 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남순이는 맥주 캔을 땄고 과자를 뜯어서 텐트 가운데 벌려 놓았다. 자리가 준비되자 주희가 물었다.
-무서운 이야기 누가 먼저 꺼낼래?
무섭든 재밌든 이야기를 기억하고 만드는 데 재주가 없던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남순이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건, 진짜 있었던 이야기야.
-이렇게 무더운 여름 날, 한 소녀가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어. 어두운 밤이었지. 아무도 없는 그런 밤. 동네 구석에 위치한 놀이터에서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어. 엄마가 오는지 안 오는지 엄마가 오는 방향을 계속 확인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한참을 그네를 타다가 밀다가 고개를 숙이고 땅을 바라보기도 했지. 얼마나 지났을까, 엄마가 도무지 올 것 같지 않았어. 피곤한 나머지 그네에서 꼬박꼬박 졸았어.
그때 엄마의 노랫소리가 들렸어.
-계수나무 한 나무 하얀 쪽배에…
익숙한 엄마의 목소리에 소녀는 기분 좋게 눈을 감고 있었어. 엄마가 밀어주는 것 같았는데, 깨어나서 보니 아무도 없는 거야. 이상하지?
소녀는 집에 돌아갔어. 엄마는 아직 집에 안 돌아왔고, 그때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어.
병원 구급실인데,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서 몇 분 전에 사망했다는 거야.
오금이 저렸다.
그것도 잠시, 다음은 내 차례인데…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고민하다 제대로 놀라지도 못했다.
한나가 입을 뗐다. 휴…
-나는 그것보다 더 무서운 이야기 알아.
한나는 입담이 좋았다. 남순이가 조용히 좌중을 천천히 조여왔다면, 한나는 믿을 수 없는 과장으로 극적 효과를 만들었다. 중간중간에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는 그 큰 눈은 텐트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고, 등 뒤에 찬 공기도 무섭게 해서 서로를 더 가깝게 했다.
-이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이야기래. 전설의 고향에서도 나왔던 이야긴데, 알고 있는 사람들은 입 꼭 다물어야 해.
어느 고등학교 야간 자습실에서 민지는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있었어. 분명히 혼자 있었는데 한참 집중하다가 돌아보니 누가 앉아 있는 거야. 자기 반 애는 아닌데, 왜 그 교실에 있을까, 의아해하면서 말이야. 또 한참 열중해서 공부를 하다가 이제 집에 가야지 하는데, 그 학생은 아직도 공부하고 있는 거야. 그래서 물었지.
“조금 있으면 학교 문 닫을 시간인데 집에 안 가?”
“어, 잠깐만 있어 봐.” 하고 주섬주섬 챙기더래. 그리고
막상 책상에서 서는데 다리는 없고 몸통으로 통통 찍으면서 따라오더래.
그것도 엄청난 속도로… 그러면서 한나는 눈의 크게 뜨고 가까이 다가와서는 워이~!하고 우리를 놀라게 했다. -꺄---
한나의 움직임에 더 놀랐다.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신 영숙이와 나는 얼굴이 빨개졌다. 과자는 떨어졌고 축축한 이불을 덮어서 빗물에 젖은 몸을 따뜻하게 데웠다.
-우리 전기 놀이할까?
일제히 손을 닦고 이불 밑으로 손을 넣었다. 어디에서 전기가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서로의눈치를살폈다. 과연 어디서 온 전기가 내게 전달되었을까, 맞춰야 한다. 모른 체하는 남순이? 눈을 돌리는 영숙이? 아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자기를 지목하길 바라는 주희? 아니야 아니야. 뭔가 쪼개는 한나가 맞아.
-한나, 너지?
-빼, 나지롱.
주희에게 졌다. 친구들이 나를 강제로 꼬꾸라뜨렸다. 내 등위로 수많은 손들 이 벼락처럼 내려쳤다.
-하늘에서 병아리가 쏟아진다. 쿵짜락 짜락 삐약삐약.
-쫘악.
-마지막에 누구 손이야. 아, 등 따가워.
한나가 배시시 웃었다.
-야, 우리 다시 해.
그렇게 여럿이 돌아가면서 약이 올랐다. 한 명씩 피로에 나가떨어질 때까지. 누가 마지막에 잤을까.
빗소리를 듣고 설핏 잠이 든 건 같은데, 선생님들이 동이 트기도 전에 학생들을 깨웠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빗물이 야영장을 휩쓸고 가거나 계곡에 물이 불어서 도로가 막힐 줄 모르니 긴급 대피 명령을 받았다고 했다. 짐을 찬찬히 챙길 시간은 없었다. 빗물에 젖은 텐트를 대충 말고, 젖은 신발을 신고 우리는 관광버스 두 대에 오 십 명 몰아 탔다. 구불구불한 계곡 도로를 타고 내려오는 산길은 어젯밤 무서운 이야기보다 더 무섭게 불어 있었다. 너무 불어서 금방이라도 버스를 타고 오를 것 같았고, 버스 기사는 좁고 가파른 도로를, 비바람에 떨어진 나뭇가지 잔해 위를 고속으로 달렸다.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야, 위험에서 살아온 학생들을 데리러 온 학부모들은 보고야 안도했다. 야영은 취소됐고, 야영 후기는 여름 방학 속으로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