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을 영문으로 읽어보려고 했다. 100()년 전의 글이며, 자연을 찬양하고 새와 꽃, 나무 이름이 어려웠다. 국문으로 읽어도 책은 쉽게 읽히지 않는다. 데이비드 소로우 스스로도 월든을 1인칭으로 자신을 주제로 한정해서 자기 중심적으로 썼다고 했다. 서사적 흐름이 없는 독백이 술술 읽힐 리는 없다. 또 누가 “호수의 얼음에 대해 트집을 잡는 이상의 치명적인 결함이 발견되지 않는다면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겠다.”고 말했듯이 모두를 위한 책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혼자 호숫가에서 뭘 하는지 도대체 누가 관심을 두겠는가. 호수가 얼마나 맑으며 거기에 날아드는 새가 그와 어떤 관계를 맺는지, 월든 호수 얼음이 다른 호수에 비해 투명한지 누가 그토록 알고 싶어 하겠는가. 그보다 동시에 읽었던 몇 천년 전의 이야기, 여러 사람이 등장해 운명이 갈리며 극적인 전쟁 한 가운데로 뛰어든 <일리아스>와 상상속의 연옥이나 지옥을 그린 <신곡>이 더 흥미진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미니멀리스트의 필독서이자 미국 청소년 권장도서에도 포함된다.
재미가 없어도 이렇게 각계의 추천서로 꼽히는 이유를 보면, “우선 미국 문학을 대표하는 뛰어난 산문으로 인정을 받게 된 그의 유려한 문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이 국어교과서에 실린 것처럼 뛰어난 자연 묘사와 자연에서 배우려고 하는 친자연주의 태도는 특출난 문학서로 평가된다.
그 외에도 역자의 설명에 따르면 <월든>은 다르게 읽을 수 있다. 하나는 그가 인간 문명의 손이 덜 탄 월든 호수가에서 혼자 집을 짓고 자급자족 생활을 한다는 점에서 <로빈슨 크루소>처럼 모험기로, “참다운 인간의 길, 자유로운 인간의 길은 무엇인가 하고 끝없이 물으며 그 길을 찾아가는 소로우의 구도자적인 모습으로서”의 정신적인 자서전으로도 읽을 수 있다.
월든 호수에서 2년 간의 생활은 미니멀리즘을 엿볼 수 있다. 그가 문명을 등진 이유는 “되도록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내 개인적인 용무를 보자는 데”라고 하는데, 다시 말해 월든 호숫가에 들어간 것은 그가 옳다고 생각한 것을 실천할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어서다. 월든 호수에서 절제하고 간소한 삶이 가능하다는 걸 증명해보고 싶어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택이 무엇인지를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것 같다. 그들은 이웃 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는 정도의 집은 나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 나머지, 가난하게 살지 않아도 될 것을 평생 가난에 쪼들리며 살고 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으려고만 끝없이 노력하고, 때로는 더 적은 것으로 만족하는 법을 배우지 않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이제 자기가 쓰는 도구의 도구가 되어”버린다. 크고 좋은 집을 사기 위해서 더 많이 일해야 하고 회복하기 위해 시간이 더 많이 든다. 가족과의 시간은 사라지며 점점 일에 노예가 된다.
“삶의 가치가 가장 떨어지는 시기에 미심쩍은 자유를 누리기 위하여 인생의 황금 시절을 돈 버는 일로 보내는 사람들”이 아닌지 돌아본다.
소로우는 실제로 <월든>에서 입에 풀칠하고 삶을 영위하는데 별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고 몸소 보여준다. 지덕일체를 지향한 삶이다.
“철학자가 된다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한다거나 어떤 학파를 세운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너무나도 사랑하여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아는 것, 지혜와 진리를 실천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소크라테스도 참된 앎은 그것을 실천하는 데 있다고 했다. 그는 엉뚱한 질문으로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것을 깨닫게 하지 않았는가. 그는 덕을 실천하기 위해서 죽음도 기꺼이 받아들이지 않았는가.
“그의 행동이 실제로 옳은가는 과연 그 행동이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인 것이다.” 참된 지식은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 그의 삶은 모두 아는 것을 실천하는 것으로 점철된다.
공자도 같은 걸 말한다.
<논어, 학이편>배우고 익히고 익히면 기쁘지 않은가.
<논어,술이편> 인격을 수양하지 못하는 것, 배운 것을 익히지 못하는 것, 옮은 일을 듣고 실천하지 못하는 것, 잘못을 고치지 못하는 것, 이것이 나의 걱정거리이다.”
알고 있는 것과 깨닫는 것과 또 그것을 몸에 익히는 것은 다르다. 순차적으로 이것을 거치겠지만, 군자와 성인은 종국에는 알고 있는 걸 실천한 사람이다.
그럼 아는 것, 옳은 것은 무엇인가. 소로우는 이렇게 말한다.
“자기 자신이라는 우주학의 전문가가 되라.
우주라는 바깥 사물의 총체에 관심을 가지기보다는, 자기 자신이라는 존재에 관심을 가지고 다른 곳에 여행할 것이 아니라 자신을 탐험해야 한다고 한다. 또 다르게 말하면 주위 사람들이 아니라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는 것이다.
“마음이 자체를 거느리지 못하면 보아도 보이지 않으며,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모른다. <대학> 제 7장 2절”
“정신이 육체를 순결과 헌신으로 변형시킬 수 있다.” 소위 정신적인 삶을 추구하는 본능을 지키라고 했다.
그런 삶을 실천하려면 다시 절제로 돌아온다. ”몸을 부지런히 놀리는 데서 지혜와 순결이 온다. 나태로부터는 무지와 관능이 온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관능은 마음의 게으른 습성이다.”
“정욕을 억제하고 육신의 외부적 감각을 억제하는 힘과 선행, 이 두 가지야말로 인간의 마음이 신에 접근하는 데 필요 불가결한 것”임을 베다는 선언하고 있다.”
“간소화하고 간소화하라. 하루에 세 끼를 먹는 대신 필요할 때 한 끼만 먹어라. 백 가지 요리를 다섯 가지로 줄여라. 그리고 다른 일들도 그런 비율로 줄이도록 하라.”
당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 무엇이 당신을 기쁘게 하는가. 무엇이 떨림을 주는가. 자신에게 중요한 것. 그것이 가치관이다. 미니멀리즘은 눈에 보이는 물건정리를 통해 가치관을 확고해 나간다. 먼저 자신이 좋아하는 물건이 둘러싸인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삶에서 어떤 것이 가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하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을 남기고 그 외의 것에 에너지와 시간을 절약한다. 줄이고 간소하게, 절제해서 삶을 조절하는 것이다. ‘쓸데없는’,’가치 없는’ 물건이나 일들이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 절제를 통해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좀 더 여유로워진다.
물건을 오래 쓰고 필요한 만큼 먹고 절제하는 삶을 동경하고 실천하려고 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우선으로 하고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한 삶을 살았다. 적게 가지는 것의 간편함과 자유로움이 있었지만, 지나친 절제는 삶의 풍요로움을 누리지 못하게 한다. 이 정도면 됐어. 네가 할 것은 그 정도야. 물건을 적게 소유하는 것만큼 정신적으로 자신에게 인색했다면 이해가 될까.
절제는 그런 게 아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에는 물질적 정신적으로 투자한다. 그렇지 않은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단순한 삶을 산다는 뜻이다.
“사람이 자기 꿈의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그리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보통 때는 생각지도 못한 성공을 맞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소로우의 삶은 절제하고 실천하는 삶이었다. 어떤 삶이 당신을 위한 것인지는 당신이 정한다. 그 끝에 생각지도 못한 성공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