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아 서적을 읽지 않는다. 심리학에 근거하여 통계적인 수치를 기준으로 또는 그들의 내담자에 관한 사례를 엮여서 알려주는 정보, 대부분 그런 경향이 있으니, 이렇게 한번 해 보세요. 아님 저렇게 해 보세요. 라는 식의 육아서적이, 내 아이와 상황에 딱 맞는 방법을 알려주리라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일반적인’ 방법보다는 나와 아이에게 최적화된 방법은 오직 나, 엄마가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다.
내 마음과 내 아이에 관해서는 내가 최고의 전문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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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나를 믿고 따라갔다. 육아 기록은 기본 도구였고, 글에서 반성하고 자신을 객관화하는 것이 가능했다. 자기상황과 상황에 따라, 그것을 어떻게 고쳐 나갈지 해결 방법을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이성적인 방법 찾기는 언제나 이성적인 엄마의 마음, 평화를 찾는 엄마만 가능하다. 자신은 시간이 없고 여유가 없기 때문에 그걸 못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바뀔 수 있다고 믿어야 바뀐다. 그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믿어온 우리 부모님의 교육 방식과 그것을 곧이 곧대로 따랐던 자신의 카르마를 벗어나는 아주 힘든 과정이다. 그러나 일단 벗어나기로 마음먹었다면 그 이후는 생각보다 쉽다. 바꾸겠다고 이것이 올바른 방법인지를 객관적으로 보고 이성적으로 따지자. 자기 행동 하나하나에 질문해야 한다. 당신과 동등한 인격자, 남편과 아이들이 당신과 함께 할 것이다.
아이들은 우리가 가르쳐야 할 대상이 아니다. 아이들은 작지만 그들의 우주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들은 부모와 다른 세상을 경험하고 다른 세상을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합리적으로 결정할 것인지, 어떻게 내가 알고 있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가 충돌하고, 어느 것이 옳은지 생각하고 선택하며 그에 따르는 책임을 질 것인가 사고 능력을 길러주는 데 있다.
우리는 아이들이 어리다고 해서 모든 것을 아이들을 위해서 골라주고 판단에 영향을 준다. 자아가 약한아이들은 자신의 세계나 마찬가지인 부모의 말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고, 그것이 좋은 선택이라고 배운다. 사실은 이것 또한 부모들의 수많은 방어기제와 두려움 때문에 가장 쉬운 선택을 하는지도 모르고.
그래서, 부모는 아이들의 왜?라는 질문에 항상 부딪친다. 그들은 부모의 가치관과 선택이 옳은지를 궁금해한다. 이유 없이, 그렇게 배운 거라서, 질문하지 않은 채, 생각하지 않은 채 그렇게 했던 행동 때문에 우리는 자주 아이들의 질문에 말문이 막힌다. ‘게을러서’ 그것들을 수용하고 그러려니 했어. 솔직하게 고백한다.
어렸을 때 삼켰던 질문을, 아이가 내가 한 질문을, 진지하게 내게 해본다.
과연 그 행동이 옳았던가질문에 하나씩 대답하고, 잘못된 것을 바꿀 때,
아이는 커가고, 엄마도 커간다.
≪論語(논어)≫에서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 그것이 어진 일을 하는 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했다.
누군가 내 잘못을 지적하고, 그것을 인정하면 다음에 이어질 비난과 비웃음이 그렇게 싫을 수 없다. 그런 상황에 처하는 게 두렵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저지른 일이 아니라고 발뺌을 하거나, 아니면 다른 누군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책임 전가를 어렸을 때부터 배웠을까. 사과도 잘 하지 않는 뻔뻔한 어른으로 자랐다. 아이들에게 내 죄책감을 되물림하고 싶지 않다.
-누가 이거 깼어?
누구에게 책임을 전가시키고, 누구의 책임을 찾는 일. 그런 일은 수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난다. 누가 했는지 그 사람을 찾아내고 그 사람에게 비난의 화살이 쏘면, 나머지 사람들은 안도할 수 있다.
-아, 내가 아니었지.
문제에 대한 근본 해결책 혹은 미래에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해결 방안은 세우기는커녕 단순히 그 문제를 벗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듯.
아이가 그릇을 깨거나, 물을 엎지르면 그 실수 자체보다 그에 따른 부모님의 반응에 아이들은 두려움을 느끼며 질린다. 질책받을 게 겁이 나서 찔끔하고 움츠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실수를 하고 그걸 고치면 되는 것 아닌가. 우리 스스로도 물을 엎지를 수도 있지만, 유독 아이들의 실수에 그렇게 화를 내고, 험한 얼굴이 되는 것은 왜일까? 과연 누구에게 화를 내고 책임을 묻는 것인가?
깨진 그릇이 아까워서,
아이가 실수하는 게 싫어서,
아이가 덤벙거리는 게 싫어서, 주의를 줬는데도 여러 번 반복해서 같은 실수를 저질러서,
혹은 그 안에 든 음식이 아까워서.
어쩌면 우리의 어린 시절 부모님의 반응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그런 바보 같은 실수 하는 게 싫어서, 방어 기제일 수도 있다.
잘 생각해보자.
실수와 사고가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하고 반응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실수는 정말, 용납될 수 없는 것인가?
화낼 이유가 충분했던가?
사고를 막을 수도 있었는가?
그것이 과연 잘못된 것인가?
실수와 사고는 그냥 일어난 일이다. 물론, 실수를 미연에 방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야 마는 것이다. 사고는 그런 말에서 비롯한 것이고.
깨진 그릇에 아이가 손을 베이거나 다치지 않았는지가 우선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깨진 그릇을 주워 올리는 게 귀찮아서, 혹은 단순히 그 상황이 싫어서일 수도있다.
그러나, 아이 잘못이 아니다. 설사 잘못이 있더라도 잘못을 지적하고 엄한 벌을 내려 아이들을 감정의 궁지로 몰아넣는 것은 아이의 행동을 고치거나 사고를 방지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다.
혹은 지금 엎지러진 물을 치우거나, 깨진 그릇을 치워 일을 처리하는 것이다.
-누구에게 책임을 묻는 게 아니야. 우선 치우자. 다음에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났으면 좋겠어. 조심하자.
누구도 마음이 상하지 않고, 죄책감도 안 느끼고, 안도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다만, 실수를 줄이고 조심하면 되겠다는 의식만 남길 수 있다. 다치지 않고 건설적인 희망이 생긴 셈이다.
-조심하지, 아, 그래 조심해도 일은 일어나지 그래 그럴 수도 있어. 얼른 걸레 가지고 와. 그래도 다음에는 조금 더 조심하자.
-형아가 밀어서 그렇게 된거야.
-엄마가 누구 잘못을 따지려는 게 아니야. 그냥 이렇게 일이 일어난 거고, 어쩔 수 없었잖아. 우선 이것부터 처리하자
-괜찮아. 그럴 수도 있어.
그 말을 듣는 순간 아이 마음이 어떤지는 몰라도 내 마음이 더 편해진다.
누구 잘못을 따지고 비난하고, 누구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감추는 일이 사라졌다. 대신, 그저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것인지, 지금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다.
연년생 형제가 싸우고 있다. 잘잘못을 따지자면 둘 다 잘못했다. 그러나 그런 말은 주머니 속에 넣어둔다.
-어떻게 된 거야?
-형아가 먼저 내 장난감 가져갔어.
먼저, 울고 있는 아이에게 아프지 않느냐고 물었다.
-누가 먼저 말할거야? 자, 첫째가 먼저 이야기해 보자.
아이는 억울해서 울먹이며 설명하려 하지만 잘 안된다. 울어서 잘 못 알아듣겠으니, 진정하고 말해달라고 부탁한다. 말 하는 사이에 아이들은 마음이 풀린다.
-동생이 그래서 내 얼굴을 때렸어.
첫째도 스스로 변호한다.
싸움은 언제나 어느 한쪽만 당하는 게 아니라 쌍방이고 둘의 욕구가 상반되어서 일어난다. 누가 잘못했다 하는 판단은 하지 않는다.
한숨을 쉬면서 아이들에게 묻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보통은 자기 입장에서 설명이 끝나면, 스스로의 잘못을 알기 때문에 자진적으로 사과한다. 사태는 그렇게 쉽게 해결된다. 그리고 자기들이 알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니면 서로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각자 자리로 돌아가 다시 논다.
-왜, 방이 이렇게 어질러져 있지?”
모호하고 누군가를 탓하는 의사 표현, 자연스럽게 아이들의 반항을 일으킨다. 누가 했어, 누가 했어, 상대방에게 책임전가에 벌써 바쁘다. 떠넘기면서 다투는 게 듣기 싫어서 내가 어질러놓지 않았지만 식식거리며 정리한다. 그런 일이 자주 반복되면 스트레스가 쌓인다.
사실, 이 말의 뒤에는 방이 깨끗했으면 좋겠다는 욕구가 감춰져 있다.
-방이 어질러져 있어서 기분이 나빠. 장난감을 정리해줬으면 좋겠어.
아이들에게 부탁하지만, 그 순간 내 욕구가 강하게 밀려와 함께 치우고 싶어진다.
-엄마도 함께 할게.
5분도 안 되어서 원하는 일을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