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더혜숙 Dec 18. 2021

다문화 가정의 삼중 언어 생활기

한독 가정



우리 집에서는 세 가지 언어를 쓴다. 독일어, 영어, 한국어다.

 

https://m.blog.naver.com/jua423/221778047780


언어를 많이 배웠고, 독일에서도 외국어를 쓰며 살아가지만 가끔 외국에서 늙을 때까지 살 수 있을까, 불안하다. 특히, 내가 아파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독일 병원에 누워 있는데, 그때도 머릿속에서 문장을 생각하고 문법이 맞는지 컨트롤하며 독어로 말해야 한다면? 지금이야 괜찮지만 만약 남편과 사별하고 늙어서 요양원이라도 있는데, 어떤 친절하나 사악한 마음을 지닌 직원이 내 돈을 사기 친다면? 미래의 일까지 걱정하는 것 또한 팔자이니라.



이성적으로 돌아간다면 언어는 소통을 위한 도구이다. 단지 도구이므로, 그것이 원하는 삶을 막는 일은 없어야 하며 그 기능만 잘 작동하면 된다.



다른 건 안 해도 한국 책 읽어 주기, 아이들과의 대화는 대체로 한국어로 한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한국어 수준은 별로다. 한국에서 두 달 있을 때도 아이들은 돌아올 때즘이야 겨우 한국어 몇 마디를 자신 있게 했지만 그것도 독일로 돌아오고는 잊어버린 듯, 간혹 한국어로 해봐. 그러면 내가 외국어를 하는 것처럼 주춤하는 모습이 영력하다.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것도 선택에 따르고 흥미를 가지면 가르쳐주겠지만, 자의식이 강한 아이들은 한국어를 배우겠다고 하지 않는다. 강요할 수 없으니, (태권도도 강요하다가 망했다)


그래도 한국어 동화를 이틀 간격으로 읽어준다. 어느 날 책을 읽는데, 아이들이 ‘한숨’이라는 단어를 몰랐다.


한숨이 독일어로 뭐더라?

한숨을 직접 쉬어서 알려줬다.

아이들은 알쏭달쏭, 숨을 쉬다와 헷갈려했다.

하품하다는 아는 단어이고, 기억해서 알려주고 싶었지만 아이들은 이야기에 빠져서 내 궁금증에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궁금한 단어는 그다음 날에도 잘 기억나는 법, 찾아서 알려줬다. seuzten이다.)


그 순간은 답답했다.


처음 외국어를 배울 때처럼, 자기 의사를 표현하지 못해 답답한 심정.


아, 내가 왜 이걸 모를까.


-얘들아 너네가 크면 엄마랑 대화가 안 될 수도 있어.


갑자기 사방으로 어둠이 휩싸인 것 같았다.


-엄마는 이렇게 구체적인 단어를 독일어로 모를 때가 있고, 너희는 한국어를 잘 모르니깐, 엄마가 말하고 싶은 걸 너네한테 잘 못 전달할 수도 있어. 그때는 어떡하지?


많은 경우, 이런 질문은 아이들에게 묻는 게 아니다. 혼잣말이다.


첫째는 엄마의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몰라했다. 그냥 다음 장으로 넘어가자는 아이의 말이 서운했다. 우리 미래에 닥친 불행에 엄마는 떨려오는데, 아이들은 태평했다.


모국어라도 모르는 것은 호기심으로 배울 때 재미있고, 하나를 알았다는 것만으로 뿌듯해질 수 있다는 것.


-아들아, 그건 무슨 뜻이야?


아이들은 내 이런 질문에 익숙하고, 설명에도 익숙하다. 나는 내가 관심 없어하고 모르는 게임이나 레고, 혹은 모르는 단어 뜻, 학교에서 놀았던 놀이에 대해서 자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아이들은 내게 자기들의 세상을 자기만의 언어로 설명해줬다.


-모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거야. 모르는 걸 묻고 들어서 배우는 과정은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일들이야.


비단 언어만이 아니라 모든 방면에서 어른들이 다 아는 것도 아니고, 내국인이라고 해서 약속 날짜 시간을 착각하는 실수를 안 저지르는 것도 아니고, 언제나 네가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지도 않다. 서로 모르는 것을 가르쳐주고 그들의 세계에 한 발씩 들어갈 때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더 없는 기쁨을 느낀다.


그러고 보니 이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다. 아이들이 유치원을 가고 나보다 독일어를 더 잘하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나는 모르겠고, (계수나무 위에 타잔의 팬티가 걸려있네, 지나가던 슈퍼맨이 냄새 맡고 쓰러졌대요. 원래 노래를 변형해서 부르는 노래였다.), 아이가 학교에서 외우는 시도 잘 이해가 안 된다. 그리고 그들이 노는 게임도 잘 모른다. 모르는 것 투성이어서 또 내가 배웠던 한국 동요와 한국 놀이가 그들이 아는 것과 너무 달라서 아이들과 거리감이 생겨 서러웠는데, 가만 생각해보니 한국어로 소통해도 세대 간의 언어 차이, 또 유행하는 놀이 차이가 생겨서 물어봐야 하는 것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물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거야? 엄마는 잘 모르겠는데, 설명 좀 해 봐.

첫째는 그런 질문을 많이 받았고 자연스럽게 설명했다.


-엄마, 그러니깐 이건 첫 번째로…(독일 사람처럼 혹은 남편처럼 1부터 100까지 길게 설명하려고 폼 잡는 중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아이는 꼭 잊지 않는다.

-엄마, 알겠지?


아이의 성취감이 100으로 오른 상태다.


잘 이해했을 때는, 내가 어렸을 때  놀았던 비슷한 놀이를 설명하거나 추억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 사이에 큰 문화 차이, 세대 차이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는 동양 이국에서 온 것 같지만 그래서 더욱 마음을 오픈하고 들을 수 있다.  돈가스를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나 실뜨기, 감자에 싹이 났다 가위 바위 보, 등등 기억하고 있는 놀이를 추억 주머니에게 꺼내 주면 아이들은 신기해하고 좋아했다. 내가 모를 때, 아이들이 설명해주고, 아이들이 모를 때 내가 설명해주면 유대감으로 우리는 더 끈끈해졌다.



대화 중에 모르는 단어를 문맥에서 찾거나 바로 사전에서 찾지 못해서 그 순간에 답답할 수는 있다. 때로는 그런 단어는 그렇게 안 중요할 수도 있다. 알맞은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은 욕구 때문에 안달할 수는 있어도, 그냥 넘어가도 무방한 것들. 또 그런 욕구를 지연했다고 해서 그 욕구를 해결할 방법이 아예 사라진 것도 아니다. 다음에 알아보면 된다. 이런 단어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언어를 대하면 언어는 재밌는 놀이로 변한다.


세 가지 언어를 쓰는 우리 집에는 가끔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로 조합한 쓸데없는 말 때문에 키득키득 웃는 일이 자주 있다.


https://youtu.be/AGrsasgsFuQ


나는 알록달록한 색을 좋아해요. 내 옷장에는 알록달록한 옷 들밖에 없어요. 내게 그렇게 알록달록한 옷밖에 없는 이유는 내 남편이 화가이기 때문이죠.라는 노래 가사이다.  


"말러 말러 이스트"


마지막 가사에서 화가는 독일어로는 말러(Maler)이다. 그런데 이걸 빨리 발음하다 보면 말랑말랑처럼 들리고, 우리는 말러 대신에 말랑말랑으로 바꿔서 부르며 낄낄댄다.


삼중 언어에서 잃는 것들이 많다. 아이들은 독일어 부모에게 자라는 것보다 어휘력이 풍부하지 않을 것이고, 또 엄마가 자주 쓰지 않는 단어들 혹은 한국어로 표현했던 단어를 모를 수도 있다. 그리고 부모님이 하는 이야기를 완벽히 알아듣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부족한 점만 생각하면, 삼중 언어의 장점을 못 보게 되니 균형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삼중 언어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다양한 언어의 감각을 익힐 것이고, 그 언어로 이어진 문화의 그네를 타고 노는 것은 더욱 언어와 문화에 대한 편견 없는 시선을 가질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또 내 아이들의 경우 아시아(한국어)와 유럽 언어(독일어)의 감각을 골고루 타고났을 것이다.


단점보다 장점을 생각하며 부족하더라도 우리 가족만의 언어문화를 만들며 즐겁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작가의 이전글 [육아일기] 첫째 고양이와 둘째 강아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