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과 현실 사이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 스트릭랜드를 중심으로 이상에 집중해서 읽었다.
<달과 6펜스>의 주인공, 스트릭랜드는 달을 쫓았다. 예술의 최고 경지를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불살라 승화했다고 했다. 어느 현실적 조건, 그는 결혼해서 아내와 자식 둘이나 있었는데 그리고 중권 중개인으로 영국 사회에서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었음에도 그것들을 버리고 그림을 시작한다. “그려야 한다잖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소.” 붉은 수염에 살이 빠져 더욱 도드라진 그의 코, 그리고 그의 차가운 눈빛에서 생명의 불길이 살아 오르면서 그는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영국에 안락하게 잘 살던 스트릭랜드가 프랑스 파리로 가서 그림을 배우고, 그의 모든 행위가 그림 주위를 맴돌아가 떠밀려서 간 곳이 타히티, 그곳에서 그를 돌봐 주는 원주민 여자를 만나 그는 그의 예술 지상낙원을 가지게 되고, 나병에 걸리고 죽을 때까지 모든 정력을 그림에 바쳤다. 그런데 그가 죽기 전에 완성한 그림은 남아 있지 않고 죽음과 사라진다. 아내가 그의 유언대로 태워버렸으므로. 더욱 신비스럽게 느껴진다. 스트릭랜드가 굳이 자신의 작품을 태우라고 한 것은, 그의 영혼은 곧 예술, 이 형식 사이에 다른 아무것도 들어올 수 없었으며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 mejlivg, 출처 Unsplash
그의 삶은 얼마나 기이한가.
달과 6펜스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달은 스트릭랜드가 이상적으로 추구한 예술의 경지를 말한다. 6펜스는 영국 화폐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돈, 속세, 현실을 의미한다.
6펜스의 모든 것을 버렸으니, 사랑, 돈, 명예, 가족, 사람, 사회 모두 등지고 그가 미친 것은 그림이었다.
마침내, 그 스스로는 예술로 승화했지만 그의 삶은 어떤가. 그것에 비하면 참 허무하지 않은가? 안락한 것도 맛있는 것도 혹은 사랑도, 추구한 것이 없다. 그건 범인에게는 고통과 비슷하다.
그것은 이야기 속에나 존재할 수 있는 삶이거나 아니면 정말 성공한 사람들, 혹은 세기의 천재들이 추구했을지도 모르는 삶이다. 그러나 이런 비범한 사람의 인생이 나 같은 범인에게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운 삶을 시사한다. 그런 이상적인 삶이 있고, 그걸 보고 어느 정도 대리 만족하며 현실에만 빠져 꿈을 잊고 사는 우리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원하는 곳에 인생을 바치고 살라고.
그런 그의 예술의 경지는 달을 상징했다. 어떤 현실, 그리고 육체적 욕망에도 구애되지 않고, 아니 오히려 아무것에도 기대지 않고 훨훨 날아오르는 소요유의 경지까지 갔다고 봤다.
그런 삶과, 그런 예술의 경지를 막연히 꿈꿨던 자신이 소설의 다른 인물들보다 그가 눈에 먼저 들어온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웠다.
호메로스 서사시를 읽었을 때부터 마음이 흔들렸다. 고대 그리스의 영웅의 서사시는 영웅에 대해서 읊어야 하는데, <일리아스>에서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메넬라오스, 파리스 인물들은 책을 읽기 전에 기대했던 이상적인 영웅으로는 자격 미달이었다. 한참 실망한 후에 서서히 눈에 들어오고 자신을 대입했던 인물들은 헥토르와 파트로클로스, 그리고 네스토르, 헥토르의 아버지였다. 그들의 훌륭한 점을 자신과 비교하며, 이런 인물이 되어야지, 내 삶은 그런 모양이 되어야 하고 이상화했다. 나는 이름 없이 죽어가는 군인이 아니라 훌륭한 영웅으로 선택받아 정의롭게 죽는 영웅이어야만 했다.
<오디세이아>를 읽고 나서는 충격에 빠졌다. 오디세우스는 지혜가 뛰어나고 분별이 있지만 때로는 호기심이 지나치며 자만심이 있으며,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만 귀향길에 칼립소와 키르케 같은 여자와 함께 산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도덕적으로 봤을 때, 그는 완벽에 가까운 인물이 아니다. 오히려 사리분별이 뛰어나다고 일컫는 그가 실수를 하는 것을 보고, 인간은 자주 욕망 때문에 실수하고 나쁜 일도 저지를 수 있구나. 그래서 벌을 받아 고난을 겪을 수도 있지만 오디세우스처럼 다 이겨낼 수도 있구나 하고 현실 속의 불완전한 인간을 보았다.
내 인간관이 변화했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우리는 몸뚱어리를 가진 욕망의 존재이며 그것 때문에 비참해질 수도 있구나.라고 깊이 깨달았다.
이번 <달과 6펜스>독서에서는 스트로브와 그의 예술에 대해서 주목했다. 그는 화가라기보다는 돈 잘 버는 상인처럼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졌으며 얼굴이 반질반질하다. (말랐지만 신비로운 오로라를 내뿜는 스트릭랜드와 대조적이다) 슬픈 일이 있거나 누군가에게 모욕을 당한 표정을 보고도 사람들은 놀리기를 그만두지 않았으니, 그가 예술가가 아닌 돈을 좇는 장사꾼 외형에 가까웠기 때문에 겪은 슬픈 현실이었다.
스토로브는 6펜스에 가깝다. 그가 그리는 그림은 6펜스와 너무 가까워, 너무 통속적이어서 인기가 많고 잘 팔린다. 현실에서 희망과 이상을 발견하는데 재능이 있어서(사실 그런 것들은 너무 진부하고 평범하기는 하다) 그걸 그림으로 그린다. 그의 그림은 대중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일반적인 그림이었다고 할 것이다. 대중적으로 잘 팔릴 만한, 밝고 희망을 주는 커머셜 음반이나 틀에 박힌 영화 같다고나 할까. 세속적이어서 역사에 거룩하게 길이 길이 남을 만한 미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도 그는 예술에 조예가 깊다. 문학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미술과 함께 깊이를 더해준다. 그는 통속적이지만,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을 알아보는 식견은 있었다. 그것은 우리가 통속적이지만 그 안에서 이상적 요소를 포함할 수 있고 꿈꿀 수 있다는 의미이다. 통속적인 것에 이상, 이상적인 것에 통속이 들어있다.
평범한 인간, 나도 나약하고 보잘것없는 인간이다. 내 글이 시대를 초월하거나 가령 한 시대를 전유할 만한 사유를 지닐만 한 것도 아니다. 보통의 보통의 생각과 평범한 인간으로서 써 내는 글이 스트릭랜드의 작품처럼 창세의 신비로운 힘을 뿜고, 뿜어낼 수는 없었다. 스트로브의 평범함과 속물의 근성에서 자신의 평범함을 인식했다.
이케아에서 바닥이 거칠게 갈무리된 1.99유로 커피잔을 샀다. 취향에 딱 맞아서가 아니라 싸니깐 카트에 들어가는 컵. 안 팔리면 1 유로로 가격이 달린다. 흠이 있어도 컵의 역할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진 어떤 평범한 사람이 그걸 집어갈 것이고, 공장에서 나온 그 컵은 그 기능을 하고 어느 날 깨어질 것이다.
이케아의 커피잔처럼 특별할 것 없이, 누구 나처럼 블로그에서 일상을 기록하고 에세이를 쓴다. 좀 더 개성 있고, 남들보다 나은, 혹은 선도하는, 시대를 앞선 아니면 이상을 닮고 있어서 누군가의 꿈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삶의 우연에 기댄 게으른 사유가 만들어낸 창작을 블로그에 올린다. 그런데 스트로브처럼 이 일반적이고 평범함에서 이상을 발견할 수 있다. 글은 물론 내 존재도 잊히겠지만 내게는 그 순간이 가장 소중한 창작의 정점과 절정이다.
달과 6펜스는 닮은 색이다.
똑같이 은은하게 빛나는 불투명한 은빛이다.
서머싯 몸은 <인생의 베일>에서 완벽하게 속물인 키티 여주인공과 그녀의 불륜남 찰스를 그려냈지만, 그들이 사실은 이상적인 면, 우리 현실의 인간처럼 현실적이면서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사람인 상징과 의미를 곳곳에 배치한다. <달과 6펜스>에서도 스트릭랜드는 첫 번째 부인을 인정사정 없이 버렸어도, 타히티에서의 말년에 죽을 병에 걸려 절대로 떠나지 않겠다는 원주민 여자는 완전히 뿌리치고 혼자 죽지 않았다. 그럼 물론, 육체를 가진 인간은 절대로 그것을 완벽히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기이한 삶을 사는 듯이 보인 스트릭랜드가 타히티에서는 그리 별종이 아니라는 것도 그가 사실은 그의 삶을 살았지, 완벽한 이상을 살았다는 걸 설명하지 않는다. 작가는 스트릭랜드가 사티로스, 반인반수의 신화적 캐릭터와 닮았다고 하는데, 신성한 면과 더럽고 추악한 본능이 동시에 존재하는 모습을 빗댄 것이다.
6펜스는 달을 닮아 은빛이다. 그리고 반짝 빛날 때가 있다. 내 손 위에 쥐어진 그 돈은 세속만을 말하지 않는다. 이론은 딱 둘로 갈라서 나는 이상적이고 너는 현실적이고 속물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삶은 잔인함과 자비한 속성을 함께 어우르고 인간은 모순적인 속성을 두 개 속성을 동시에 지닐 수 있다. 고귀한 점과 비열한 점을 동시에 가진 게 인간이 아니던가.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달을 쫓으며 6펜스를 손에 쥔 것을 비극으로 보고 울 것인가. 6펜스는 달처럼 은은하니 희극으로 보고 웃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