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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Sep 17. 2019

나의 이름은


인생 별거 없다


전화를 건다. 추석 즈음 명절 때 걸어야 할 의무였다. 그러나 게으름 때문에 뒤늦게 사촌형에게 전화한다. 늦은 연락이라도 안 거는 것보다 나으니까라고 변명하며 통화를 기다린다. 사촌형은 부모님이 다 돌아가시고 나서 챙겨야 할 집안 어른이다. 의례적인 대화가 오고 간다. 그 중 빠지지 않은 주제가 근황이다. 한 마디로 “두문불출”이라는 단어로 나는 정리해 말했다. 집 밖을 안 나가는 건 아니라 할지라도 공부한다는 핑계로 대학원을 다니는 나로선 그렇게 표현할 수밖에 없다. 그러자 돌아오는 말은, “인생 별거 없다”였다. 딸을 시집보내고 손자까지 본 나이의 살 만큼 산 어른의 평가였다. 그 안에는 동생들은 다 결혼한 이후에 외로운(?) 명절을 보냈을 사촌에게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어서 짝을 찾으라는 조언을 넌지시 담고 있었다. 짧은 전화 통화는 그렇게 끝났다.



살아본 이의 입장에서 시간은 쏜살같다. 거쳐야 할 통과의례를 다 마친 사람에게, 해야 할 일 하지 못한 이는 시간을 아껴 쓰지 않은 사람처럼 비친다. 하지만 나는 꽤 열심히 살아왔다. 진지하게, 아주 진지하게, 몇 년 전 어떻게 살까라고 심각하게 고민한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 일도 따분하고, 그렇다고 그 일을 평생 업으로 살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나의 선택은, 시원하게(?) 때려치우는 결단이었다. 그리고나서 대학원에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다. 처음에는 재밌었는데 1-2년 지나니 따분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 시간 동안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이 나이에 공부한다고 소개하는 일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해 보이니 그렇다. 작은 사업이라도 했으니까 명함을 주고받으면 그만이기는 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예전 일을 딱히 하지 않으니까 골칫거리다. 그래서 언제나 소개 말미에 덧붙인다. 지금은 이런 종류 일에 관심 갖고 있다고. 그처럼 쓸모없는 사족이 달린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


보통 나이가 들면 직업이 그(그녀)의 모두는 아니라 할지라도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대개 소속이 그 사람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앞서 고백했듯 어정쩡한 상황에 처해 있는 나로서는 이거야라고 말하기가 애매한 처지다. 사업이 규모가 있고 성과가 있다면야 상관없지만 말이다. 어찌됐든 지금은 공부를 하는 일이 주 일과가 됐다. 그것도 이번 학기가 마지막 학기다. 이제 고민이 다시 시작된다. 무엇이라고 나를 규정할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살 것인가. 주변을 둘러보니 대개 직장을 다니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저런 질문을 잘 안 던지는 듯하다. 물론, 이것은 싱글로 사는 나만의 착각일지 모른다. 주변 친구를 만나면, 대개 화젯거리는 돈으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 가장이라는 책임 때문에 경제적 실천이 다른 문제를 거의 삼켜버린다. 그에 비해 다른 정체성을 고민하는 나는 그들 기준에서 보면 이상한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다.



그래도 좋다! 어차피 각자의 삶은 그들 얼굴만큼이나 다채로우니까. 그들 가치에 휩쓸릴 필요는 없다. 그래서 내가 삶의 가치로 정한 후보가 있다. 바로 ‘자유’다. 혼자 사는데 무슨 자유 타령이냐고 타박할지 모르겠다. 솔직히 누가 뭐라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구속되지 않을 자유가 아니다. 곰곰이 생각해보자. 사회적 관계망에서 완전히 탈출할 사람은 누구도 없다. 설령, 그가 자연인이라고 할지라도.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는 이 관계 속에서 살아야 한다. 물리적으로 분리됐다고 하더라도 완벽한 자연인이있는지 모르겠다. 자연인조차 사람이 그리우니 화면에 얼굴을 비추는 거 아닌가. 이처럼 자유는 상대적일 뿐이다. 어떤 맥락에 처해 있느냐에 따라 자유는 전혀 다른 의미를 띠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삶에서 내가 지향하는 자유는 어떤 종류일까?



어떤 자유


우선 고민하는 자유는 경제적 자유다. 책상머리에서 공부한다고 돈 버는 일에 절대로 초월하지 못한다. 오히려 반대다. 수면 아래로 온통 어떻게 먹고 살까라는 고민이 차지한다. 과거의 경험도 그렇지만 먹고 사는 일이야말로 모든 사람의 관심사이고 그래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 마르크스의 <독일이데올로기> 한 구절이 생각난다. “인간이 역사를 만들기 위해서는 살아가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살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면 인간은 역사를 만들지 못한다. 생존하지 못하는데, 다른 실천이 무슨 소용이랴. 나는 이 구절을 생각할 때마다 혼자 웃는다. 너무나 간명하게 인간 실존 조건을 말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누구나 알법한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공부라는 핑계로 잊기 쉬운 현실을 계속 상기하게 된다. 이른바 관념, 이념, 정신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이 현실과 비교하면 껍데기에 불과하다. 공부를 하면서 계속 경계했던 적도 이런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자유는 경제적 자유가 끝인가. 그럴리가! 우리는 흔히 먹고 살기 위해 일한다고 읊는다.  “먹고 산다” 구절에서 보이듯 '먹는 것'과 '사는 것'은 다르다. '먹는 것'으로 환원되지 못하는 ‘사는 것'의 영역이 있다. 모든 자유 중 경제적 자유가 우선순위에 있기는 하지만, 인간은 욕구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두 번째로 중요하게 간주하는 자유는 문화적 자유다. 삶을 충만하기 위해 선택한 자유다. 그런데 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있다. 바로 시간이다. 생활비를 버느라 허덕거리면 책 한 권 읽을 시간, 영화 한 편 볼 시간, 전시회를 다녀올 시간이 있는가. 이 자유는 그래서 경제적 자유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 점에서 첫 번째 자유는 두 번째 자유와 밀접히 관련이 있다. 어떤 자유라도 다른 자유와 분리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모든 자유는 접합돼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정치적 자유를 말하고 싶다. 누군가는 우리나라처럼 표현의 자유가 폭넓게 허용되는데 이 자유는 뭐냐 되물을지 모른다. 형식상 정치적 자유는 인정되는 듯 보인다. 적어도 법에 명문화돼있긴 하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보면 반드시 그럴까. 우리 사회처럼 엄숙한 사회가 있던가. 수많은 사람들이 대도시에 몰려 살기 때문인지 몰라도 타인의 시선에 우리는 너무 민감하다. 예를 들어, 정해진 통과 의례를 늦거나 하지 않으면 도처에서 잔소리가 들린다. 게다가 종래 다른 생각이 있더라도 우리는 일단, 자신을 검열하게 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 자기 검열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니 자신의 감정, 느낌, 사고를 솔직히 표현하기가 너무 함들다. 적당히 주변 눈높이에서 맞춰 나가게 된다. 이런 점에서 우리 사회는 평균을 지향하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 안정이라는 이름으로 추구되는 모든 것이 그렇다. 그래서 나는 정치적 자유를 마지막으로 자유의 후보군으로 선택하겠다.



지금까지 내가 살고 싶은 자유의 종류를 열거해봤다. 그런데 이게 나만의 꿈이랴. 누구나 자유롭게 살고 싶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삶을 선택하지 못한다. 대개 현실이라는 장벽을 내세우면서 다른 선택을 고른다. 비슷한 걱정이 들 때마다 나는 사고로 갑자기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삶이 짧다고 느낀다. 예기치 못한 사고로 떠나간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하루를 살아도 충실히 살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이름으로 주저없이 자유를 고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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