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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Sep 24. 2019

판단중지

조국과 미디어


판단중지


미디어를 볼 때마차 수많은 기사가 눈에 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을 다루는 기사인 경우 섣부르게 판단을 내리기 힘들다. 그런 기사를 볼 때 마다 나는 고대 회의론자의 ‘판단중지(epochē)’ 개념을 떠올린다. 회의론자에 따르면 모든 주장은 주장하는 사람의 맥락과 주장의 대상의 맥락에 따라 달라지므로 좋다, 나쁘다, 또는 참이다, 거짓이다를 섭불리 판단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그들은 말 그대로 ‘판단중지’하였다. 회의론자의 판단중지가 판단 과정에서 거치는 잠정적 중단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안이 처한 ‘맥락’을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판단을 보류하는 결단이 옳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사실에 비춰 판단을 내리고 결국에 오류를 낳는다. 오늘 갑작스럽게 ‘판단중지’가 생각났던 이유는, 한두 달에 걸쳐 진행되는 조국 법무부 장관과 관련 기사를 접하다가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지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그저 진영 논리에 의존해 판단하기 보다는 스스로 생각해서 결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조국 대전”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면에는 이 공방이 ‘전쟁’과 같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부르는 듯하다. 따라서 전선이 분명한 전쟁처럼 이쪽이냐 저쪽이냐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그 전선에서 대립하는 이름을 붙여보면, 조국 대 반조국, 민주당 대 자유한국당, 조국 대 검찰, 진보 대 보수 등 다양한 명칭을 붙일 수 있을 듯하다. 물론, 누군가는 앞선 사례에서 등장하는 전선의 경계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른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고, 가령, 정의 대 비정의 문제틀에서 이 문제를 바라볼지 모르겠다. 무엇이든 좋다. 중요한 문제는 이 이슈가 지속될수록 사람들은 경계에 머무르지 말고, 이쪽이냐 저쪽이냐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을 보여주는 게 여론조사인 듯하다. 찬성, 반대, 부동 등을 보여주는 통계야말로 그 선택의 결과물이다. 그런데 문제는 과연 우리는 제대로 사실을 알고 판단하는고 있는가이다. 사실은 없고, 그저 특정한 프레임에 갇힌 채 선택하는 게 아닐까? 정치의 유불리를 떠나 어느 경우든 시작은 사실에서 비롯돼야 한다.




소스의 원천


법무부 장관 임용 뒤로 잠잠해질 듯하던 관련 기사가 이번 주(?)에도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보면, 이 사태가 쉽사리 정리되지 않을 사안인 듯하다. 솔직히 한 달을 넘어 지속되는 어떤 이슈라도 피로감을 선사하게 마련이다. 정치적 입장이 어떻든, 조국을 지지하든 않든 말이다. 이 사안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각각 이슈를 분석하고 입장을 정하겠지만, 대부분 사람은 헤드라인으로 스쳐 지나가 제목만이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이것이 가져오는 문제가 있다. 설령, 의혹이라 할지라도 거기에 결부된 부정적 정서가 은연중 각인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혹의 중심에 선 누군가는 진실이 밝혀져도 회복하지 못할 피해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사태의 진실을 판단하기에 나 같은 평범한 이는 너무 게으르기도 하고 사안을 따라가기에 시간이 없다. 이럴 때야말로 저 회의론자의 ‘판단중지’ 자세가 필요하다. 너무 많은 이슈, 혹은 의혹이 터져나오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미디어가 떠먹이는 대로 휩쓸리지 않을까라는 걱정이 가장 크다. 그런 점에서 조국이라는 키워드로 생산되는 미디어 뉴스는 상당히 편향돼 있는 듯하다.



요즘 이 키워드로 나오는 많은 기사(아마도 포털 메인에 실리는 기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는 ‘검찰발’ 기사이다. 상당수 기사가 “검찰 관계자”, “검찰 핵심 관계자” 등 주어를 달고 시작된다. 이미 어떤 사건은 기소됐고, 어떤 사건은 압수수색 등이 이뤄지다 보니, 그 기사 소스는 온통 검찰에 의지한다. 그런데 상당수 기사가 소스의 원천이 그렇다보니, 검찰측의 주장을 대변하는 듯한 뉘앙스를 보인다. 나는 이 현상이 대단히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반대편의 입장을 전혀 들려주지 않기 때문이다.  설사 알 권리를 주장하는 입장에서 보더라도 그렇다. 이 사안이 정말로 알아야 할 대상인가. 간간이 조국 법무부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가 페이스북 등으로 전달되는 기사가 보이나, 그 수가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적다. 아마도 기소가 되거나 기소를 앞 둔 사안을 재판장이 아닌 다른 장소에서 대응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듯하다. 너무 일찍 자기 방어 논리를 상대에게 공개하는 위험 부담이 큰 탓이다.



미디어의 잡음


“새로운” 뉴스가 공개될 때마다, 그리고 타이틀 앞에 “단독”이라는 선전이 붙을 때마다, 그리고 그 출처가 “검찰”일 때마다 나는 판단을 보류하게 된다. 기사를 꼼꼼이 읽기에 시간도 없지만 그것 보다도 결론이 너무나 뻔히 예상되기에 그렇다. 결론은 언제나 의심하는 자의 입장에서 ‘정황상’ 의심된다는 것으로 끝난다. ‘정황’이란 게 뭔가. 직접적인 증거가 아니라, 간접적인 증거로 살펴보니 그럴지 모른다는 뜻이다. 중요한 대목은 ‘직접적’으로 관련된 증거는 없다는 소리다. 결국 양쪽이 (겉으로) 동의할 만한 진위 판단은 법정에 가서야 내려질 듯 보인다. 그렇다면 수많은 의혹 기사는 실체를 들려주기는 커녕 이를 가리는 잡음일 뿐이다. 적어도 이쪽 입장을 전달했다면, 저쪽 입장도 전달하는 게 형편상 맞지 않을까. 기계적 중립이 아니라 하더라도, 입체적으로 사안을 이해할 정도의 내용은 전달해야 옳다고 믿는다. 의혹이라는 이유로 도배되는 기사를 볼 때마다, 이들 미디어가 살기 위해서 참으로 애쓴다는 측은함까지 느낀다. 그렇게 기사를 양산하지 못하면 클릭수로 대변되는 주목을 유도하지 못하고 사라질 테니까. 중요한 가치는 주목에 따른 돈이고 거기에 진실은 중요하지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조국의 문제는 보이지 않고 유독 미디어의 문제만 보인다. 정말로 개혁되어야 할 대상 중 하나는 언론이다. 독자나 시청자가 방법상 판단중지해야할 정도로 검증되지 않는 기사를 쏟아내고 있으니까. 알아서 네가 떠 먹어라는 심보의 기사에서 나는 적어도 당분간 판단중지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덧붙여 상대방 입장도 이해해보려 계속 노력하겠다. 주장의 근거를 한번 정도는 살펴봐야 한다. 설령, 결국 그것이 헛된 손짓이라도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같은 편이라고 믿는 진영의 논리에 휩쓸릴지 모르니까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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