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바이러스와 신천지
계획대로 실현됐다면 베트남 다낭의 미케 해변을 여유롭게 걷고 있었을 것이다. 수년간 스스로를 괴롭히던 논문을 제출하고 그 공로를 스스로 칭찬(?)하고자 생각했던 나름의 여행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지난 주 갑작스럽게 항공사가 비행기 결향을 통고했다. 그에 따라 나의 여행도 취소되었다. 호텔비를 날린 채 말이다. 갈수록 코로나바이러스가 창궐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잘 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멀쩡한 돈을 날려 속이 쓰린 건 어쩌지 못했다. 두어달 전만 해도 사태가 이렇게 변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고 보면 세상은 언제나 돌발적 사건으로 가득차 있다. 대구 신천지를 중심으로 역병이 창궐할지 누가 예상했겠는가.
이래저래 맥이 빠져 있지만 그래도 요즘 관심 있게 찾아 보는 뉴스가 있다. 바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된 ‘신천지’ 뉴스이다. 누군가는 신천지를 “이단"이라 칭하고, 누군가는 “사이비”라 욕하고, 누군가는 “신흥종교” 내지 “유사종교"라 부른다. 기독교 신자도 아닌 나의 입장에서 모 종교학자의 언급처럼 잠정적으로 “신흥 종교”라 신천지를 부르는 게 적당할 듯 싶다. 신천지 뉴스를 읽다가 문득 머리를 스쳤던 질문은 왜 인간은 종교를 갖는가였다. 과거보다는 종교인구가 계속 줄어든다고 하나 한쪽에서는 신천지처럼 교세를 확장하는 종교도 있으니 말이다. 우리 사회가 세속화되었다고 해서 앞으로 종교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지는 않는다.
종교를 바라보는 나의 입장은 과거에 칸트의 책 제목마냥 ‘이성의 한계 안에서 종교’였다. 도덕법칙 내지 실천이성 내에서 종교가 나름의 그 가치가 있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었다. 따라서 어떤 종교가 이성적, 또는 도덕적이 아니라면 그 종교는 거짓 종교라는 판단해도 무방할 것이다(물론 ‘이성적’, ‘도덕적’이라는 술어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답한 뒤의 결론이겠지만). 게다가 누구나 신앙의 자유는 있으니 그 종교가 ‘반사회적’이 아니라면 누가 어떤 종교를 가지든 무슨 상관이랴. 주변에는 수많은 교인이 있으니 그들이 무얼 믿건 그러려니 한다(아, 이런 무심한 태도라니).
그렇다면 앞선 질문으로 다시 돌아가자. 왜 인간은 종교를 가지나? 나의 잠정적 가설은 인간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절대자, 보통은 “신”이라 부르는 존재를 호출한다는 것이다. 전지 ∙ 전능 ∙ 전선한 존재가 죽음의 이유를 설명(?)해주기를 간절히 기대하면서 말이다. 긍국적으로 죽음의 불안 앞에서 작동하는 종교는 가까이는 현실에서 고통의 이유를 설명한다. 촘촘한 인과관계의 틀에서 말이다. 거기에 더해 현세의 고통을 보상받을 수 있는 길을 안내한다. 그걸 누구는 ‘영생’이라고 포장한다. 내세가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다. 아니면 다른 버전도 있으니 윤회가 그것이다. 그런데 죽음이든 고통이든 이 화두는 설명될 수 있는 질문인가?
로마의 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루크레티우스는 에피쿠로스의 철학을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시에서 소개한다(나는 이 대목을 알튀세르의 책을 읽다 발견했다). 이 시의 내용은 세계의 시작 이전에 원자들이 비처럼 떨어졌다고, 그리고 우연히, 정말 우연히! 원자들이 마주쳐 세계가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게 무슨 소린가. 세상에서는 너무나 많은 우연이 있다. 우연적 사건들을 설명할 길이 없다. 비슷하게 의미를 갖지 않는 질문도 너무나 많다. 앞서 종교가 응답하려고 시도했던 그런 질문들이 대표적인 종류 아닐까. 시작, 기원, 목적 따위를 묻는 게 애시당초 의미없는 부류의 질문인 것이다. 14만 4천 명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외치는 저 신천지의 교리에서 눈살이 찌푸려졌던 이유 중 하나는, 무의미한 질문에 애써 답을 시도하는 그런 헛된 짓 때문이었다.
참고로 친구 중에 대형교회 목사가 한 명 있다. 일년에 한 번 정도 안부전화가 오는데 가끔 그 친구가 전화를 끊기 전에 말한다. “ooo야 예수 믿어!” 우스개 소리(?)라는 것을 알기에 별다른 대구를 하지는 않고 서로 웃지만, 속으로 나는 외친다. ‘사탄아, 물러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