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 실천을 위한 단상
누군가 “철학은 가르칠 수 없다”고 말한다면 상대방은 대뜸 반문할 것이다. “수많은 독자가 철학 교과서를 읽고 철학 교사가 가르치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고. 그런데 앞선 말은 플라톤과 칸트의 전언이다. 칸트의 입을 빌려 구체적으로 언급하자면 “어떤 철학도 가르칠 수 없으며. 오직 철학함만을 가르칠 수 있다.” 철학이란 명사가 아니라, 철학함이란 동사를 강조한 말일테다. 주로 학교에서 이뤄지는 철학 교육을 생각해보면 철학의 고전 텍스트를 강독하는 일로 주로 수업이 이뤄진다. 그런데 여기서 진지하게 묻고 싶다. 과연 텍스트이든 교사이든 간에 이들을 매개로 학생은 철학함을 진정으로 배우는가? 학부에서 대학원까지 철학을 배웠던 나 자신의 경험을 돌이켜보자면 자신있게 ‘예’라고 답변하지 못하겠다. 특히 대학원 수업에서 발제라도 있는 날이면 준비를 완벽하게(?) 하기 위해 텍스트를 이해하느라 급급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철학함이란 어떻게 이뤄져야 한다 말인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 ‘철학하다’라는 ‘철학적 실천’이 규정돼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참고하고 싶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일반적인 실천의 의미를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실천은 우선, 도덕적 ∙ 정치적 행위에 국한된 ‘프락시스(praxis)’였다. 이론 내지 관조(theōria)와는 다른 행위이다. 이때 프락시스란 자신의 행위에만 국한되지 않고 사회적 의미를 지녔다는 데 관심을 둬야 한다. 그런 점에서 실천은 개인에게 귀속되는 단순한 ‘행위’ 내지 ‘활동’과는 다른 종류인 셈이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프락시스 외에도 제작이나 생산을 뜻하는 ‘포이에시스(poiésis)가 실천의 다른 종류로 강조돼야 한다. 왜냐하면 생산이나 제작 역시 사회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노동이 그 사례일 것이다. 노동과정 중에 노동력은 노동대상을 노동도구로 변형하니까 말이다. 프락시스이든 포이에시스이든 사회적 행위로서 실천은 그 대상의 위치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뿐이다. 자아의 밖에 있다면 포이에시스 안에 있다면 프락시스인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철학적 실천은 세계의 변화뿐만 아니라 자신의 변화라는 과제를 충실히 이행해야 하는 실천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앞서 나의 경험을 돌이켜 보자면 철학함은 이론으로서 철학에 너무 방점이 찍혀 있었다. 특이한 사실은 대중에게 철학을 대하는 현실도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철학 텍스트는 종종 다이제스트 형식의 교양서로 대중에게 정보를 전달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에 어떤 철학적 사유의 즐거움이 있겠는가. 게다가 ‘지혜의 사랑’이란 수식어에 가려져 철학적 실천을 어떻게 기대할 수 있단 말인가. 수많은 철학자의 이론이 간략히 소개되는 알쓸신잡식의 정보의 열거의 끝에서 말이다(그렇다고 자료나 정보라는 점에서 전혀 가치가 없지는 않다).
이론으로서만 전달되는 철학에 기대할 수 있는 실천이란 ‘관념론적’ 철학적 실천에 불과하다. 여기서는 텍스트의 다시 읽기가 강조된다. 그것도 영원한 다시 읽기로서 말이다. 철학적 텍스트를 읽는 가운데 독자는 그 텍스트가 제기하는 명시적 또는 암묵적 질문과 응답에 시름하며 나름의 내적 대화를 수행한다. 과거에 내가 고민했던 철학적 실천은 이 정도가 다였다. 그런데 이런 텍스트 읽기에 기반한 철학적 실천은 문제가 없을까? 그런 텍스트는 외부 없는 세계에 불과하다! 구체적인 시공간의 장이 고려되지 않는다. 보편으로서 문제만 강조되고 그에 따라 답변이 추구된다. 플라톤을 읽든, 칸트를 읽든, 하이데거를 읽든 그들의 문제는 시대와 상관없이 유효한 문제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역사가 없다. 그래서 철학은 영원하다는 테제가 성립한다.
이런 철학 텍스트 속에서 이뤄지는 철학적 실천은 철저히 외부에서 이론을 관조하는 일에 불과하다. 거리를 띠우고 이론으로서만 그 자체를 즐긴다. 그렇다 보니 텍스트의 원환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텍스트 속에서 빙빙 도는 텍스트 읽기는 과연 철학을 왜 공부하는가라는 의문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만든다. 그것은 전업 철학자라고 해서 다를까. 각자의 철학함의 이유를 주변에서 물어본 적은 없지만, 그들은 대개 지적인 호기심이 우선이었을 테다. 그러다보니 그들과 대화는 ‘아주’ 관념적인 대화로 흐르고 피상적인 결론으로 끝마치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철학적 실천을 도모할 것인가?
나는 철학이 유물론적인 철학적 실천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철학적 문제는 텍스트의 문제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현실적인 문제에서 유래하며, 현실에서 그 효과를 발생시켜키는 문제로서 고민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철학은 언제나 그렇듯 잊혀질 것이고 대중에게 그 가치를 의심받게 될 것이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의 홀대의 배경에는 상아탑을 강조하고 외부를 삭제한 결과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고 철학 텍스트를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설령 그 철학 텍스트가 관념론적인 철학의 관점에서 쓰여졌다고 해서 말이다. 우리는 무에서 출발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유물론적인 철학적 실천이란 긴 우회를 의미한다. 현실에서 출발해 텍스트로, 그리고 다시 현실로 긴 여행을 떠나야 한다. 텍스트를 매개하지 않고는 도달할 수 없는 곳이 있는 법이다. 탐험가들이 긴 탐험 끝에 세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었듯이 철학적 실천은 그런 긴 우회를 거쳐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그리고 긴 여행 끝에 돌아온 결과가 텍스트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 콘텍스트와 관계 속에서 고민하고 실천돼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그 보다 나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