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 장애 시대의 영화
요새 주말 밤 나의 시간을 책임져주는 놀이는 넷플릭스다. 사실 동생이 넷플릭스 아이디를 주지 않았다면 나는 전혀 넷플릭스를 애용할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수많은 콘텐츠가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너무 많은 콘텐츠가 이유였다. 일단 시작하면 정기적으로 영화를 볼 터이니 그 자체가 부담으로 다가왔기 때문이다. 성격상 시작하기 힘들어서 그렇지 나는 한번 시작하면 모든지 끝을 본다. 여하간 동생이 선사한 선물(?) 덕분에 몇 달 전부터 주말은 넷플릭스 시청으로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정기적으로 영화를 관람하고 기록을 남기는 나에게 넷플릭스에서 경험은 앞서 언급한 문제외에도 골치거리를 던져주었다.
처음에 넷플릭스에서 영화 경험은 예상대로 흥미로웠다. 오리지널 시리즈나 영화를 드디어(!) 관람할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었다.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으면 보지 못할(?) 영화를 드디어 보게 되어서다. 물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라 할지라도 우회적으로 구해서 볼 방법은 얼마든지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나는 게으름쟁이다. 왠만해선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보자면 이전에 귀동냥하던 영화를 보게 되서인지 몰라도 처음 몇 주 동안은 만족스러웠다. 마음 속에 생각해둔 영화 목록을 쭉 뽑은 다음에 하나씩 찾아서 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리스트의 영화가 하나씩 제거되어 결국 사라져 버리자 시작되었다. 이제는 뭘 볼까라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자연스럽게 볼 만한 영화를 추천하는 글을 찾게 된다. 단순하게는 구글에 “넷플릭스 추천 영화”와 같은 키워드를 넣고 검색을 해본다. 조금 더 검색범위를 좁히자면 장르나 감독, 주제 등을 추가해 검색을 시도한다. 또는 넷플릭스 커뮤니티를 찾아 들어가 눈동냥을 한다. 좋아요와 나빠요를 비롯해 간단한 리뷰까지 찾아 본다. 그런데 이런 검색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딱히 눈에 들어오는 영화가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왜냐하면 순위를 매겨 놓은 영화리스트는 대개 나의 취미와 어긋나기 때문이었다. 대중의 몰취미와 몰개성에 내가 장단을 맞추는 거 같아 쉽게 신뢰가 가지 않은 것도 또 다른 이유였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도중에도 정지 버튼을 누를까 말까하는 고민에 빠지곤했다. ‘넷플릭스 신드롬’의 증후군에 빠진 게 아닐까라는 순간에 도달해 버리고만 것이다.
나의 영화 습관을 고백하자면 한 번 보기 시작한 영화는 끝까지 본다. 이런 습관은 극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지루한 영화라 할지라도 극장에서 자본 경험이 거의 없다(?). 그리고 집에서 영화를 볼 때도 중간에 잠시 화장실을 갈 경우를 제외하고는 끝까지 본다. 그게 나의 영화 보기의 원칙이다. 그런데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뒤로는 가끔 고민에 빠진다. 그나마 한 편의 영화라면 상관이 없다. 문제는 “오리지널 시리즈”라고 이름붙인 연작에서 온다. 시리즈를 볼 때면 지금까지 들인 시간이 아까워서, 또는 끝이 궁금해서 시간을 견뎌보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은 그조차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점에서 넷플릭스는 관객을 이끌어줄만 지침을 마련해주지 않는다. 선택은 자유이나 그 결과는 이용자가 책임지라는 식이다.
넷플릭스가 그나마 관객을 위해 해주는 가이드는 빅데이터를 활용해 “오늘 한국의 TOP 10 콘텐츠”, “지금 뜨는 콘텐츠” 등 정도다. 그리고 시청자의 과거 이력을 바탕으로 관심가질 만한 영화를 추천한다. 하지만 길게 줄지어진 추천 영화를 볼 때마다 나는 항상 물음표를 던진다. ‘이게 정말 나의 기호인가?’ 딱히 나의 취미라고 하기에 거리가 먼 영화를 볼 때면 이 공간에서 영화 경험이 충분하지 않구나라고 자위할 뿐이다(충분한 데이터가 안 쌓여서 빅데이터가 빅데이터가 이닌가 보다). 이때 평점이라도 매겨져 있거나 간략한 평가만 있어도 넷플릭스가 제공하면 얼마나 좋을까(넷플릭스 고객센터에 들어가 찾아보면 2018년 중반까지 후기서비스를 제공했으나 사용자 급감으로 폐지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런 저런 이유로 넷플릭스는 이용자와 대화를 게을리하는 서비스다. 앞서 내가 선택 장애에 부딪혀 아쉬웠던 지점은 넷플릭스가 직접 개입하는 커뮤니티의 부재였다. 바깥에 몇몇 커뮤니티가 있긴 하지만 쉽게 눈길이 안 갔다. 넷플릭스에 접속하면 대문에 “영화, TV 프로그램을 무제한으로.”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것이 아마도 넷플릭스가 지향하는 고객 가치의 방향일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양이 아니라 질에 더 신경써야 하지 않을까. 내년이면 디즈니의 OTT가 한국에 서비스를 시작한다는 소식이 들린다. 경쟁자가 하나 더 늘면 앞으로 서비스가 어떻게 달라질지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저렴한 가격과 눈에 띄는 오리지널 영화나 시리즈는 여전히 넷플릭스의 장점이다. 그래서 나는 넷플릭스가 고마울 때가 있다. 요즘 내가 종종 보는 장르는 애니메이션이다. 그 중에서도 어린 시절 보던 애니메이션을 리부팅한 작품들이 많다. 아마도 넷플릭스의 지원을 받지 않았더라면 쉽게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자에게나 관객에게 넷플릭스는 선택의 기회를 선사한다. 그나저나 이번 주말은 무엇을 볼까. 벌써부터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