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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May 08. 2020

흔들리지 말아야 할 나이, 흔들려도 좋다

불혹(不惑) 에 대하여

불혹 즈음


<논어> 위정편에는 공자가 자신의 학문 여정을 술회하는 내용이 나온다. 그 핵심에는 지학(志學), 이립(而立), 불혹(不惑), 지천명(知天命), 이순(耳順), 종심(從心)이라는 나이를 뜻하는 단어가 있다. 어릴 때는 저 숫자가 지칭하는 삶을 굳이 살아야하나 의구심이 들 때가 많았다. 각자 삶의 주기가 있는데 천편일률적인 생을 강요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 나이가 들아보니 주변 사람의 생활이나 나의 생활이나 별반 다르지 않구나 느낄 때가 많다. 그러면서 잘 살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한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나는 조금은 어긋난 삶을 사는 듯하다. 흔들리지 않을 나이, 불혹 즈음에 다시 대학원을 진학한 것만 봐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20대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한 경험이 있다. 석사가 끝나고 공부를 더 이어가고 싶었으나 경제적 책임 탓에 나는 생계를 위해 돈을 벌어야 했다. 그 시간 동안 다시 공부를 한다는 셍각을 해본 적이 없다. 이제는 지나가버린 과거의 시간으로 여겼으니까. 그런데 불혹 즈음 2번째로 대학원을 진학했던 것이다. 이때 특별히 학문의 뜻이 있다거나 학위 욕심이 있어서도 아니었다. 이유를 굳이 찾자면 단 하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세상을 연달아 떠난 이후 내게는 휴식이 필요했다. 그래서 누군가 왜 학교에 갔냐고 물어보면 항상 이렇게 답하곤 했다. “그냥 쉬고 싶어서.” 하지만 이런 답변이 주변에서 언제나 우호적인 반응을 이끌지는 못했다. 때로는 날선 반응이 돌아와 상처를 입곤 했다. 친구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 절친 한 명에게 진학 소식을 알리자 그 친구는 대뜸 이런 질문을 내게 던졌다. “돈은 되냐?” 그것도 몇번이나 되묻기에 기분이 나뻤던 기억이 있다. ‘한창 돈 벌어야할 나이에 공부라니!’ 그 친구 눈에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비쳐졌을 테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런 선택을 했던 또 다른 이유 하나는 아마 비혼?(미혼?)이라는 조건도 한 몫 한 듯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었으니까 말이다. 다른 동생들은 각자 삶을 잘 영위하고 있었으니 나는 내 자신만 온전히 책임지면 됐다. 그런데 다들 알지만 살아보면 가장 힘든 게 자신을 책임지는 일이다. 어찌됐든 나는 과감히(?) 학교에 돌아갔다.  



오빠X 아저씨? 선배!


늦은 나이에 학교에 갔지만 대학원 생활이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다. 대학원 동기 중 유일한 남성인데가 그들과 나이차가 10년에서 15년이나 차이가 났으니까 말이다. 말만 동기지 그들 눈에는 이상한 아저씨로 보였을 테니까. 내가 그 차이를 생생하게 느꼈던 기회는 호칭에 있었다. 대학원을 갓 입학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시기였다. 한 친구가 다가오더니 대뜸 묻는 질문이 뭐라고 불리고 싶냐고 물었다. ‘내가 부를 이름도 아닌데 내가 호칭까지 정해줘야 하나’ 나의 내심은 이랬다. 그런데 그 질문 끝에 이어지는 그녀의 단호한 한 마디, “오빠는 안 돼요!”  딱히 오빠라고 불리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그들과 건널 수 없는 차이를 실감했다. 그래서 그 협상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아저씨”도 아니고 그렇다고 절대로 “오빠”는 될 수 없는 “선배”로 호칭이 결정되었다. 나는 그렇게 대학원 생활 내내 “xx 선배”로 불렸다.



시간은 빠르다. 저 에피소드도 과거의 일이 되버렸다. 그 사이 대학원 동기 몇몇은 직장을 다니고 있고 나는 논문을 쓰고 올해 졸업을 했다. 코로나바이러스 탓에 졸업식은 생략됐지만 말이다. 그러면서 지난 몇 년간 학교 생활의 손익을 계산해보게 된다. 모든 선택은 잃은 것도 얻은 것도 있는 법이다. 본래 목표가 휴식이었는데 너무나 분주하게 다녀 딱히 쉰 느낌이 없다. 대학원 수업외에도 학부의 선수강 수업, 그리고 세미나 등까지 빠지지 않고 다녔다. 혹시라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소위 ‘빠졌다’는 소리 듣기 싫어서 수업도 맨앞에서 듣곤 했다. 그럼에도 그 시간만큼 경제적 활동의 시간은 줄어들어 계속 돈을 까먹고 지냈다. 그러고 보면 절친의 우려처럼 돈이 안 되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그럼에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다. 설령 그것이 정신 승리일지라도 말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불혹 정도 나이가 되면 새롭게 도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시작을 했고 적어도 결론을 냈다. 예전부터 나의 장점 중 하나가 일단 시작을 하면 그게 뭐든지 끝낸다는 거였다. 설령 시작하기 힘들더라도 말이다. 앞서 대학원 진학만 바도 그렇다. 해당 학교 진학 시험을 위해 반년 정도를 준비했고 대학원 수료 이후 논문을 쓰기 위해 무려 2년의 시간을 더 보냈다. 일단은 그 시간의 무게를 견딘 자신을 재발견했으니 기분은 좋다. 그렇게 공부라도 하지 않았다면 부모님을 떠난 상실감이 심해져 더 힘들게 보내지 않았을까. 그 기간이 법적 다툼의 시간도 겹쳐 있었으니까 내외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던 시간이었다.



시간 도둑


이제 또 다른 출발선에 서있다. 연초부터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 노력하고 있었다. 딱히 정답은 없다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그때마다 생각나는 소설 하나가 있었다.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모모>라는 소설이다. 어릴 때 읽은 이 이야기에서 나는 유독 ‘시간 도둑’이 기억에 남았다. 우리는 열심히 산다고 하면서 타인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낭비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자신을 위해서 시간을 온전히 쓰고 싶은 사람이다. 생계가 중요하지만 돈을 번다면 시간을 팔기 보다는 가치를 팔아서 벌고 싶은 사람이다. 그런 이유 탓에 회사를 다니기 보다 연구, 창작, 사업 등에 신경을 쓰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갑자기 사고사로 떠난 부모님의 죽음도 한 몫했을 것이다. 애도의 시간을 보내면서 느꼈던 점은 우리 생은 굉장히 짧다는 것이다. 누구나 태어나 살고 사랑하고 죽는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나의 시간을 더 사랑하며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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