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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Jul 21. 2020

나란 인간은 말이야

오랜만에 글을 쓴다

게으름을 위한 변명


오랜만에 글을 쓴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주기적으로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기는 게 올초 목표였는데 어쩌다보니 내팽겨쳤다. 굳이 변명을 늘어놓자면 바빴다(?). 먹고 사는 게 포도청이니 이런저런 일 때문에 말이다. 그렇다고 게으르게 살았다고 말하지도 못하겠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계획대로 움직이고 자정이 넘은 시간에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중간중간 농땡이도 부렸다. 직장에 다니는 처지도 아니니 시간을 어떻게 보내건 내 선택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피곤이라는 이유로 시간을 흘러보내면 그날 취침무렵에는 죄책감이 든다. 누가 화를 내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이때 유용하게 사용하는 물건이 다이어리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꾸준히 애용하고 있는 사물을 고르라면 나는 다이어리를 고르겠다. 그곳에는 스케줄에 따라 일정을 적고 수행유무가 표시되어있다. 나는 가끔 지난 다이어리를 연초부터 지금까지 쭉 흝어본다. 군데군데 비어있는 날짜도 있지만 주중에는 빼곡하게 낙서가 돼있다. 기상시간은 물론 식사시간까지 표시된 것만 봐도 그날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알 수가 있다. 그런 점에서 메모는 하루를 충실히 보내도록 도움을 준다. 거기에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계획하는 힘까지 덤으로 선물한다. 그런 메모를 쳐다보고 있노라면 나란 인간이 보인다.



나란 인간은 말이야


나는 누가 뭐래건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사려는 욕망이 큰 사람이다. 누구의 눈에는 똥고집일 것 같기도 한데 나이가 들어 생각해보니 결국에는 내식대로 살아온 자신을 발견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세상과 불화처럼 보일텐데도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그 사람의 선택과 책임은 온전히 그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가족이라도 연인이라도 자신의 삶을 대신하지는 못한다. 주변을 둘러보니 적당히 타협하고 사는 게 현실이다. 그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나 자신 또한 현실이라는 장벽에 잠시 타협하고 낯선 길에서 해멨으니까. 그런데 그런 시절 마음 한구석에는 평생 이렇게 살다 죽는 거 아닌가라는 우울감 때문에 힘든 시간이었다. 거기에 덧붙여 불면증에 뜬눈으로 밤을 보내곤 했다.



그럼에도 경제적으로 보자면 현실과 타협한 그 시간은 나름대로 풍족했던 기간이었다. 통장 잔고는 매달 쌓이고 흔히 ‘재테크’라 부른는 잡기에 열중하곤 했다. 그러나 불면증이라는 증상이 보여준 것처럼 마음 한켠은 피폐해져갔다. 게다가 때로는 알 수 없는 가슴 통증이 가끔 밀려오곤 했는데 그럴 때마다 일종의 공항장애가 아닐까라는 의심까지 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 통증은 다행스럽게도(?) 위염이 원인이었다. 간식과 야식과 같은 무절제한 식습관이 문제였던 것이다. 여하간 자신의 의지대로 못 사는 삶이라는 게 스스로를 병들게 한다. 그래서 무력감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 중 하나는 자신을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믿는다. 소크라테스의 명언 ‘네 자신을 알라’는 그런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누군가의 건전한 욕망은 그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고 생의 활기를 선사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신경쓰는 게 습관이다.



좋은 리듬을 위하여


좋은 삶의 리듬을 만들기 위해 좋은 습관을 들여야 한다. 앞서 언급했듯 잠을 못 자고 불안에 시달린다면 나쁜 리듬이 몸에 배긴 탓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 내가 선택했던 방법은 앞서 말한 다이어리에 적어놓는 시간표를 실천하는 일이였다. 그 중에서도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스케줄, 바로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고 정해진 시간에 자기를 지키려고 노력했다. 여기에 덧붙여 꾸준한 운동이 뒷받침되자 나의 불면증은 어느 날 사라져 버렸다. 오히려 요즘들어서는 너무 잘 자는 게 걱정이 될 정도이다. 마음이 편한 건지 몸이 편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전망에 대한 불안이 어느 순간 없어져 버렸다. 근거 없는 낙관 때문이 아니라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던 게 이유 아닐까.



주변 친구 하나는 이런 나를 보고 “달관했다”고 표현하던데 그 말도 틀리지 않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있는 게 인생 아니던가. 그래서 부정 속에 긍정을, 긍정 속에 부정을 보게 되고 설령 그것이 모순이라 하더라도 이해하려는 미덕을 얻었다. 덕분에 나는 종종 주변에서 삶의 고통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 두 단어를 강조하면 전화를 끊곤한다. ‘인내와 끈기’. 모든 것이 변한다면 너무 슬퍼할 일도, 그리고 너무 걱정스런 일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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