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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Feb 17. 2023

그들의 이름을 불러라

영화 <낯설고 먼>(2020)


1인칭 죽음, 2인칭 죽음, 3인칭 죽음

프랑스의 철학자 장켈레비치(Vladimir Jankélévitch)는 죽음을 세가지 인칭으로 분류한다. 먼저, ‘1인칭 죽음’은 나의 죽음으로 경험할 수도 알 수도 없는 죽음이다. 이에 반해 ‘2인칭 죽음’은 나와 가까운 사람의 죽음으로 이로 인해 죽음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사건이다. 끝으로 ‘3인칭 죽음’은 나와 무관한 타인의 죽음으로 사회적∙통계적 의미를 지닐 뿐이다. 그런데 이 철학자의 지적처럼 보통 우리는 죽음을 타인의 죽음, 즉 3인칭 죽음으로만 간주하고 자신과 무관한 죽음인 냥 스스로를 기만한다.


생각해보면 미디어로 전달되는 수많은 기사 속 죽음이 얼마나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치겠는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건으로 취급될 뿐이다. 그러나 어떤 죽음은 그 죽음이 2인칭 죽음이 아니라고 해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건이 있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그 죽음이 나뿐만 아니라 주변 누구에게나 닥칠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때 죽음은 2인칭으로 탈바꿈되고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 채 흔들 것이다.



영원한 죽음

영화 <낯설고 먼>(2020)(이하 낯선)은 어떤 죽음을 다룬다. 32분이라는 짧은 상영 시간 동안 관객은 한 남성의 죽음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도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의 죽음이다. 카터(조이 배드애스)는 클럽에서 만난 패리(자리아)와 하룻밤을 보내고 자신의 애완견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건물을 나서자마자 백인 경찰 머크(앤드류 하워드)의 불시 검문을 받고 시비가 붙어 살해당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는 순간 카터는 그날 아침으로 돌아가 패리의 침대에서 황급히 깨어난다. 그리고 다시 건물을 나서지만 죽음이란 사건은 여지없이 계속 반복되고 그날 아침 깨어난다.


여기까지 영화 <낯선>을 보면 그저 흔하고 흔한 타임 슬립 영화처럼 보인다. 이제 관객의 궁금증은 주인공이 저 영원할 듯한 죽음의 원환을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로 모아진다. 단편영화로는 담을 수 없을 것 같은 저 문제를 주워 담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기대 반 걱정 반을 갖고서 말이다. 하지만 영화는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 전까지 어떤 해결도 제시하지 않는다! 카터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적인 죽음을 맞이할 뿐이다. 다만 애완견이 있을 자신의 집으로 돌아갈 의지를 다지면서.


영화의 끝에 이르러 영리한 관객이라면 흑인 청년의 죽음이 카터 개인의 죽음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챌 것이다. 영화는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에 의해 죽었을 어떤 흑인을 재현하기 때문이다. 흑백 갈등 속에서 억울하게 사라진 주인공들은 영화 끝 엔딩 크레디트와 함께 다시 등장한다. 스태프의 이름 사이로 등장한 고유명은 어떤 진술의 주어로 제시된다. 가령, “에릭 가너는 싸움을 뜯어말림 참이었다.”, “미셸 쿠소는 현관 잠금장치를 교체하고 있었다.”, “타미르 라이스는 공원에서 놀고 있었다.” 등. 수많은 이름이 나열되고 영화는 말한다. 이들은 많은 이름 중 일부에 불과하다고.


영화 <낯선>은 주인공 카터를 죽음의 구조에서 구출하지 못하지만 이 반복적인 죽음을 끝낼 단서를 제시한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라(Say their names)”, “그들의 이름을 기억하라(Remember their names)” 망자를 위해 산 자가 할 수 있는 노력은 기억이다. 그리고 그 기억은 고유명인 이름을 외치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래야 한때 고유한 우주였을 망자를 진정으로 기리고 죽음의 재생산을 끝낼 수 있다. 비로소 이들 죽음은 3인칭이 아니라 2인칭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미디어의 단신 기사로 취급되는 의미 없는 죽음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존엄을 일깨우는 죽음이 되는 것이다.



그들의 이름을 불러라

이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이태원 12/9 참사를 떠올렸다. 현재 150명이 넘는 꽃다운 목숨을 앗아간 사건이 일어난 뒤 진상 규명은 더디고 책임자 처벌은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정부는 형식적인 조문 절차로 이 사건을 잊으라고 강요한다. 참사 이후 애도 기간에 벌어진 ‘근조’라는 단어 하나 새겨지지 않은 검은 리본과 희생자 영정 사진 하나 없는 공식(?) 분향소는 무엇이겠는가. 그저 사망자 몇명, 부상자 몇명으로 이 사건을 기억하고 이들 죽음을 잊으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3인칭 죽음으로 이들 희생을 취급해서는 진정한 애도도 진상 규명도 이뤄질 수 없다.


무작정 죽음을 잊으라 말하는 이들에게 장켈레비치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싶다.


잠시나마 당신이 머물렀던 세계는 당신의 짧은 생이 없었을 수도 있을 세계와는 돌이킬 수 없이 그리고 영원히 다릅니다.


이태원  12/9 참사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에게 위로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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