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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Sep 03. 2019

정치는 욕망이다

조국이라는 키워드


키워드 '조국'


매일 아침 나는 라디오(정확하게는 유튜브로 중계되는 라디오)의 시사방송과 함께 하루를 시작한다. 그 방송의 이름은 TBS <김어준의 뉴스공장>(이하 뉴스공장)이다. 그 이전에도 아침을 텔레비전 뉴스와 함께 시작하곤 했다. 그러나 기성 언론의 식상함과 몰상식(?)에 질려 지상파 뉴스를 보지 않은 지 오래다. 그 자리를 대체한 방송이 <뉴스공장>이다. 그렇다고 내가 진행자 김어준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도 아니다(한때 팟캐스트 <나꼼수>를 애청하기도 했지만, 지난 대선까지가 김어준의 역할이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정권을 바뀌어서도 세상이 달라지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활약은 계속될 듯 하다). 그저 주류의 목소리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하지 않은 진행 스타일이 좋다. 그런 점에서 최근 법무부장관 내정자 조국의 의혹을 전달하는 <뉴스공장> 방송은 흥미롭다.  



수십만 건의 기사가 ‘조국’ 키워드로 1-2주 동안 송출됐다고 하는데, 진보∙보수 언론 상관없이 의혹을 제기하기 바쁘다. 경주마식의 보도만 있다. 이런 점에서 언론의 정치적 태도와 상관없이 우리 언론은 문제가 많다. 누군가는 이것을 “광기”라고 표현하는데 나는 동의한다. 진실을 판가름하기 위해서 사실을 제시해야 하지만 대부분 기사에는 이것이 빠져 있다. 하기 싫어서 안 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까고(?) 본다. 이에 반해 <뉴스공장>은 진행자의 정치적 입장이 어떻건 일단 관련자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준다. 특히, 최근 조국 내정자의 딸 입시와 관련된 몇몇 증언들은 일방적으로 매도되고 있는 상대방 처지를 이해하는 데 유효했다.



최근 정점은 지난 주 유시민 전 의원의 관전평(?)이었던 듯하다. 사안에 거리를 두고 맥락을 차분히 살펴 볼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잊혀지지 않은 평은, 조국 내정자를 두고 벌어지는 언론의 드라마가, 유시민 전 장관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리스 비극”에서 “(가족을 인질로 하는) 스릴러” 장르로 바뀌고 있다고 평한 대목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유시민 작가(전 장관이라는 호칭보다 지금부터 그가 원하는 작가라는 호칭을 붙이겠다)의 내공을 본다. 청취자가 핵심을 잘 파악하도록 언론 행태를 간명하게 요약하는 것이다. 조국이라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명사의 추락을 즐기다가, 주변 가족의 문제를 하나둘 꺼내면서 그들을 모욕하고 끝내는 인격살인을 행하고 있다는 평가다. 유시민 작가의 설명을 듣고 있자니 그의 표현처럼 “사람이 무섭다”. 가족은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 기회도 없이 수많은 악플에 시달리고 있는 셈이지 않는가. 시간이 흘러 진실이 드러나도 그들에게 해명의 기회는 없을 것이다.



욕망의 전쟁터


장르에 빗대 언론 행태를 설명하는 유시민 작가의 평을 듣다가 정치가 과연 무엇이길래 이렇게 폭력적이어야 하는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정치는 폭력이다. 무기만 손에 안 들었지 욕망의 전쟁터가 정치 아닌가. 욕망이 대립하는 현장에서 상대는 무찔러야 할 적일 뿐이다. 이때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동원하는 유력한 도구가 언론이 ‘여론’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정말로 사람들이 믿는지와 별로 상관이 없다. 수많은 헤드라인만 봐도 그렇다. 자기네 구미에 맞는 타이틀을 고르지 않던가. 이때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생각이 아니다. 그렇다면 정치의 장소는 오로지 현실에만 있지 않다. 사람들이 생각한다고 믿는, 또는 주장하는 그 상상 속에서 정치는 움직인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여론’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조국 내정자와 관련해 언론이 설파하는 상상은 도대체 무엇인가?



조국 내정자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살펴보면 상상의 본체를 알 듯하다. 그들의 비난 중 하나는 과거 조국이 외쳤던 가치를 ‘위선’이라고 문제 삼는다. 그런 가치의 사례 하나가 ‘정의’이다. 문재인정부의 슬로건 “국민의 나라, 정의로운 대한민국”와 묘하게 연관된다. 원하건 원하지 않건 조국 내정자는 문재인정부의 상징적 인물 아닌가. 민정수석에서 법무부장관 내정까지 이력이 그것을 증명한다. 그런데 정의라는 가치가 진보건 보수건 특정한 정파의 전유물일리 없다. 정의는 공통의 가치다. 하지만 비난하는 이들의 목소리에는 자기네와 네들도 마찬가지라는 힐난이 숨겨져 있다. 이른바 오십보백보라는 지적이다. 조국과 같은 이가 현실에서는 지키지 못할 입바른 소리를 한다는 비난이다. 그런데 정말로 오십보나 백보나 다 같은가?



바람이 불어오는 곳


맹자와 얽힌 이 고사에서 오십보와 백보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어떤 맥락에 있느냐에 따라 그 차이가 굉장히 크다. ‘도덕’, ‘윤리’, ‘법’ 등 상징적 질서는 현실 세계에서 준수되기 어렵다. 그렇다고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소리가 아니다. 모든 것을 양립불가능한 모순으로 간주하는 사고를 경계하자는 얘기다. 흑백사고의 오류란, 세상의 색깔이 오로지 검정색과 흰색만 있다고 간주하는 전제에서 비롯된다. 검정색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것이 흰색을 좋아한다는 의미인가. 검정색과 흰색 말고도 세상에는 다채로운 색이 존재한다. 검정과 흰색 사이 무수한 색의 스펙트럼을 봐야 한다. 그러므로 지켜야만 한다는 명령, 즉 당위는 지킬 수 있다는 의미를 이해해야 하지만, 또한 그것이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



순수에 대한 강박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과연 그런 지적을 할 정도로 순수한가? 특정한 프레임에 누군가를 가두고 공격하는 이들이야말로 자신의 욕망을 철저하게 숨긴다. 그들이야말로 위선자 아닌가. 이들의 욕망이 정의롭고자 하는 욕망일까? 아니다! 그 욕망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상대를 꼬꾸라뜨리려는 열망이다. 조국 사태를 보며 나는 정치인 노회찬과 노무현이 떠올랐다. 성인이 되고 나서 지켜본 정치인 중 그들은 꽤나 괜찮은 정치인이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런데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언론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생전에 어떻게 이들을 모욕했던가. 완벽히 선한 자가 있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대적으로 더 선한 자를, 그리고 덜 악한 자를, 우리 대표로 지지하겠다.



며칠 사이 국내 포털 실시간 검색어에는 낯선 해시태그가 보인다. “#조국힘내세요, #가짜뉴스아웃, #한국언론사망, #법대로임명, #정치검찰아웃, #나경원자녀의혹” 등이다. 이 해시태그에서도 어떤 욕망을 본다. 그것은 기성 언론이 ‘여론’이라고 부르짖던 욕망이 아니다. 이들 해시태그에서 정치는 놀이가 되고 있다. 이 연쇄적인 놀이 계열에서 나는 어떤 분기점을 본다. 광폭하게 휘몰아치던 바람의 방향이 바뀌고 있다. 그 바람이 어디로 불지 그리고 어떻게 불지 나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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