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단편소설에 흥미를 붙인 건 레이먼드 카버 덕이다. 지난해 나도 필사라는 걸 해보았다. 방콕의 CSP사무실에서 매일 한 시간씩 필사하며 여름을 보냈는데 Nelson은 '오! 카피를 한다고? 그건 도둑질 아니니?'라고 농담을 했다. 필사로 필력을 도둑질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바라는 바이지만 필사는 필력을 훔쳐 오지 않았다. 필사가 필력을 키워주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의미로 도움을 준다는 데는 동의한다. 책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건 필사의 장점 중 하나일 것이다.‘A small good thing’의 <A small good thing>은 필사했던 많은 단편 중 가장 잊을 수 없는 이야기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필사를 통해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섰다.
문장을 하나씩 만지면서 천천히 위로받았다. <A small good thing>은 내가 가장 여러 번 읽은 단편이다. 처음엔 낭독해주는 글을 들었고 필사했고 눈으로 여러 번 읽었다. 세 번의 독법은 각각 의미를 주었는데 가장 좋았던 건 귀로 듣는 쪽이었다.
그 이야기를 처음 들은 건 세월호의 슬픔이 닥친 직후였다. 심장을 수십 번 파도가 철썩 때리고 가듯 잔인한 사건이 해변에 뱉어놓은 죄책감 때문에 무력해졌을 때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잊을 수 없는 4월이었다. 무엇을 먹고 무슨 일을 하는 지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의식이 있는 시간 동안 빈틈없이 누군가 가시로 몸을 찌르는 것 같았다. 좌절감과 자책감에 짓눌려 몸을 똑바로 뉘이지도 못하고 옆으로 누웠다가도 다시 벌떡 일어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A small good thing> 낭독을 들으면서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위로받았다. 숨 쉴 틈을 찾아냈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中 -
두 달 후 깊은 상처를 다시 위로해준 건 필사였다. 같은 이야기였지만 이번엔 나만의 이야기였다. 위로받았고 동시에 문장의 비밀을 조금 엿보았다. 눈으로 읽을 때 보이지 않던 것들이 조금씩 보였다. 기억력이 나빠서 딱히 꼬집어 말할 만한 게 또 없지만(읽은 건 맞니;) 암튼 그때 필사의 맛이 이런 거구나 했다. 그래서 이후 레이먼드 카버의 다른 소설집 하나를 또 필사하기 시작했다. 끝까지 마치지는 못했다. 언어의 위로가 쏟아진 여름이었다.
필사와 Nelson부부의 위로가 없었다면 나는 그때를 어떻게 보냈을까? <A small good thing>의 빵집 주인처럼 부부는 나를 잘 먹이는 사명을 부여받은 것처럼 많이도 먹였다. 사서 먹이고 만들어 먹이고 받아 먹이고 먹을 것의 목록을 정해주었다. 한 달중 대부분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나는 거의 말이 없었다. 부부는 어색해하는 기색이 없었다. 캐묻지도 않았다. 휴일이 아닌 날에도 수시로 불러 데리고 다니며 사사로운 이야기들을 들려주며 끼니를 챙겨 먹였다. 낯선 손님에게 무얼 그렇게 많이 베풀어 준다는 건 넉넉하지 않은 부부의 생활에 쉽지 않은 일 일 텐데. 전혀 고민하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았다.
처음 만난 사이에 그토록 살뜰히 챙겨줄 이유가 전혀 없는데 묻지도 않고 궁금해하지도 않고 한 달을 함께 보냈다. 마지막 날 작별 인사를 나누며 쏟은 눈물에 대해서도 묻지 않았다. 이야기하기엔 너무 얽혀있는,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골을 눈물로만 설명했다. 지나 보니 더욱 고마워진다. 위로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지금도 그 시간 덕분에 그들로부터 위로받고 있다.
들려주는 위로
일 년 후 필사 책을 하나 샀다.‘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오글오글한 제목이지만 그래도 좋았다. 시를 읽은 지 오래되었으니 시를 적어보자는 마음이었다. 풀어놓은 글보다 함축된 의미를 만지고 싶었다. 그렇게 하면 내가 더 오래 그 글에 달라붙어있을 수 있으니 좋겠다고 생각했다. 더 오래 위로받을 것 같았다. 오랜만에 펜으로 시를 적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듣는 것이 가장 좋았다. 특히 시의 경우는 더.
책을 통해 진하게 위로받고 싶다면, 듣는 방법을 추천하고 싶다. 마치 나에게만 하는 말처럼 들린다. 눈으로 빨리 스쳐 보내던 단어와 문장이 천천히 실체를 드러낸다. 놓칠 뻔했던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내가 위로받았던‘별 것 아니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방법을 권한다. 누군가 위로하고 싶을 땐 천천히 읽어주는 것도 좋겠다. 쑥스러운 내 말을 책이 대신해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