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Jan 01. 2016

복 터지게 받아라

새해가 별거냐

해가 바뀌는 걸 덤덤히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과 약속을 잡아 사는 얘기를 주고받았다. 갈수록 사는 게 퍽퍽하니 참 씁쓸하다. 그래도 별 수 있나. 내년에도 개미처럼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쌀국수를 후루룩 삼키면서 씁쓸한 에너지를 위에 저장했다.


지나온 시간을 돌아보는 건 찌질 한 게 아니라 오늘의 안줏거리일 뿐이라는 걸 최근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철딱서니 없었지만 ‘젊다는 게 다 그렇지’ 스럽던 20대, <밤과 음악 사이>에서 발바닥 부르트게 비벼대던 언니들이 이젠 새벽까지 놀기엔 체력이 모자란다고 한탄했다. 시댁과 친정 식구들 뒤치다꺼리하면서도 아직 불타는 열정이 있으니 일하고 싶다고 부르짖는 친구는 내일 이유식 만들려면 일찍 일어나야 해서 술은 마실 수 없다고 했다. 그녀의 잔에 위로의 건배를.

방송가에서 아직도 꾸준히 밤을 새우고 ‘끼인 세대’라 억울한 심정을 토로하는 친구들에게 여전히 잘 버티고 있는 너희는 정말 대단하다고 어깨를 두드렸다. 배운 게 도둑질인 걸 어쩌냐는 말에 다시 한 번 건배. 명색이 송년회인데 쌀국수에 비비큐치킨은 완벽한 메뉴 선정 실패라고 신년회를 다시 하기로 했다. 신촌의 단골 이자카야로 모실 테니 새해엔 너도 천천히 술을 늘려라. 이제 우리도 예전처럼 꽐라 될 때까지는 못 마신다. 우리도 나이 먹었다. 하면서 500 한 잔 추가요.


열정 페이란 말도 모르고 점심값 계산하며 메뉴 정하던 시절, 할인쿠폰 들고 가서 둘이  하나시켜 먹던 레스토랑을 지나 인적 없는 여의도를 가로질러 간다. 저기 우리가 자주 가던 사케 집이 있다. 거기 오코노미야끼가 별미였지. 그때 맛있던 생선구이 집은 지금도 맛있지만 옛 동료들과 가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편집실에서 졸다 기어 나와 후루룩 국수 한 그릇 하던 문화 살롱은 오늘도 문을 열었을까?

결혼생활의 스트레스를 걸쭉한 입담에 녹여버리는 친구는 내년엔 집 있는 남자 만나 결혼하라는 어른스러운 덕담을 남겼다. 오랫동안 모르던 옛 동기들 소식도 들었다. 우리 중 가장 먼저 방송국 문을 열었던 나는 가장 먼저 방송국 문을 나왔다. 후회 없는 좋은 선택이었다. 들 때와 날 때 모두. 그때 이후로 벌써 꽉 채워 4년이 지났는데 너희가 좀 더 편히 정당한 대우를 받고 일하면 좋으련만. 다시 잔을 채우지 않을 수 없구나. 새해라고 별 거 있냐. 앞가림 잘 하면서 주변에 폐 끼치지 말고 스스로 오그라들지 말고. 일 년 또 앞으로 앞으로 걸어가는 거지.


살다 보니 우리도 남들처럼 별일 다 겪는다. 이혼했다는 친구 이야기에 마음 짠해지고, 술 마시고 진상 피웠다는 얘기에 나이 값은 하고 살자 한소리 하며 웃어주고.  먹고사는 일이 맘 같으면 좋겠다고 괜한 소리도 한다. 그런 저녁이 있기 전 점심엔 회사 동료와 내년을 다짐했다. 우리 내년엔 꿈 찾아 박차고 나서자. 한자리에 너무 오래 머물면 안 된다. 발바닥이 땅에 박히기 전에 차고 오르자는 다짐을 했다.  

1년의 끝을 여미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건 송구영신 예배로 한다. 예배실 앞에서 말씀 카드를 뽑기 전 두근두근 짧은 기도를 한다. 2016년의 말씀은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편 23:5” 내 원수가 누구냐. 후후훗. 음흉한 미소를 짓다가 ‘주님 요런 못된 마음도 2015년 지은 많은 죄에 묶어 회개합니다.’ 하고 예배실 맨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앉았다. 예배를 마치고 나오니 해가 바뀌어 있다. 기분은 바뀌지 않았다. 어유~추워 하면서 집으로 오느라 새해인지 아닌지 신경 쓸 틈도 없었다.

오늘은 새해 첫날이다. 어른스럽게 첫날부터 내년 재정 계획을 점검했다. 모아봐야 티끌이지만 티끌이라도 없으면 불안하니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 얘들아, 올해도 같이 가자. 연말엔 또 비슷한 얘기와 한탄, 어느 정도의 기대 섞인 말들을 늘어놓을 테지만, 그런 일도 좋지 않니? 올해는 역전 만루홈런 아니어도 운 좋게 텍사스 안타라도 치면 좋겠다. 그게 아니어도 서로 벤치 클리어링 잊지 말자. 인생이 너클볼을 수없이 날리더라도 또 한 해 잘 살아보자.


올핸 부디 복 터지게 받아봤음 좋겠다. 우리도.

매거진의 이전글 왜 거기에 있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