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WonderPaul May 31. 2019

달력에 없는 하루

휴식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일까 하고 싶었던 더 많은 일을 하는 상태일까. 엄마는 완벽한 후자에 속하고 동생은 반대쪽이다. 나는 엄마가까운 편인데 얼마 전 우리는 특별한 휴식을 계획했다. 엄마가 먼저 제안했고 동생이가 완성한 휴은 부암동 나들이였다.


오늘은 엄마가 살게. 일하느라 수고했으니까 엄마가 제대로 사야지.


모험과 낯선 경험을 두려워하는 엄마와 낯선 동네를 찾아가는 일은 조심스럽다.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 자매가 그에 앞서 답사를 다녀온 것이다. 결론적으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어쨌거나 그날은 날이 궂었다. 오전부터 빗방울이 흩날다. 내가 아는 모든 사람 중에 호기심이 가장 많은 엄마는 버스를 타고 고즈넉한 동네로 접어들기까지 창문에 얼굴이 붙이고 밖을 관찰했다.



고전적인 분위기의 중식당은 적어도 십 년 이상씩은 일한 것처럼 노련한 중년 신사, 잉어들이 꼬리를 팔랑 거리는 호수, 뒤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제법 멋진 곳이었다. 코스요리는 엄마 마음에 쏙 들었던 것 같다.


알지? 오늘 언니를 위한 자리라는 건 형식적인 거야.


당연히 알고 있다. 모든 나들이의 중심은 결국 엄마가 된다. 코스요리의 장점은 식사속도가 저절로 조절된다는 것이다. 우리 가족이 이례적으로 1시간 넘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덕분에 오랫동안 만족스러운 식사와 분위기를 누렸다.


식사 후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고 천천히 동네 산길을 올랐다. 오래된 단독주택은 주인들이 정성스럽게 가꾼 정원이 멋스러웠다. 촉촉하게 흩뿌리는 비 덕분에 초록이 선명하고 깨끗한 공기가 상쾌해서 오르막 길도 걸을만했다. 여행자가 된 것처럼 낯선 동네 누군가의 집 담장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어느새 비가 그쳤고 볕이 좋아서 익숙하지만 낯선 풍경이 더 예쁘게 사진에 박혔다.



산길을 올라 카페에 도착했다. 나무가 많이 보이는 창가 쪽에 앉아서 종로에서 사 온 맛있는 아메리칸 쿠키를 디저트 삼아 커피를 홀짝였다.


 우리 가을에 또 오자. 단풍이 예쁘겠다.


우리 자매가 준비한 나들이 코스에 대한 별점이 4개 이상은 되는 것 같아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복잡한 일상에서 비껴 나와 좋은 걸 먹고 예쁜 걸 보는 평범한 휴식이었지만 흠잡을 데 없이, 틀어지는 것 하나 없이 좋은 날이었다. 게다가 우리가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는 것이 하루를 완벽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였다.  



휴식의 마무리는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선택했다. 엄마는 영화 보러 가자는 말 대신 극장 구경 가자고 말한다. 영화를 보러 가면 자주 잠이 들고 멀티플렉스형 영화관 이전에는 엄마가 자는 동안 상영 영화가 바뀌기도 했다. 일 년쯤 지나면 영화 내용조차 다 잊는다. 그래도 엄마는 영화관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집에서 IPTV로 더 많은 영화를 볼 수 있지만 별로 흥미로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엄마는 '극장 구경'을 원하는 게 맞다. 극장의 거대한 화면과 사운드, 몰입하게 하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 같다. 그리고 캐러멜 팝콘.


오늘의 영화 알라딘은 엄마 취향에도 딱 들어맞았다. 거의 지루할 틈 없는 볼거리와 음악, 가벼운 유머. 단순한 줄거리. 휴식에 어울리는 영화였다. 게다가 영화티켓을 보여주고 2,000원에 리필한 캐러멜 팝콘!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였지만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 동생이가 좋아하는 카페, 엄마가 좋아하는 영화, 모두가 맛있었던 식사, 팝콘 추가까지 완벽했다. 가끔은 기대하지 않은 완벽한 하루가 찾아오는가 보다. 이렇게까지 좋은 하루 기대하지 않았는데. 사진 속에 찍힌 엄마의 표정이 들떠있다. 오늘이 유달리 좋았던 건 엄마가 종일 즐거워했기 때문이었다. 잘 쉬었다. 마치 달력에 없는 것 같은 하루였다.


작가의 이전글 그것은 천천히 올 것이고 우리는 괴로울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