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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02. 2019

길을 걸었지.  누군가 곁에 있다고 느꼈을 때

하교는 사교 행위였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 앞 '이모네'분식집을 지나 정류장 까지 같이 걸으며 친목을 다지고 우정을 확인다. 고등학교 첫 1년 동안은 이름처럼 피부가 하얀 설희랑 미소년 장동건, 키 작은 복숭이와 함께 걸었다.  40년 간 광야를 헤맨 이스라엘 민족처럼 10분이면 될 버스정류장1시간이나 걸려 도착했다. ‘이모네’에서 라볶이와 튀김을 먹고 아이스크림 하나 빨면서 천천히 걸었기 때문이다. 천천히 걸으면 시간  붙잡을 수 있을 것처럼 느리잇 느리이이잇 걸었다.


가끔 복숭이가 개인행동을 했다. ‘혼자 걷고 싶어.’ 라면서 몇 주씩 하교 대열에서 벗어났다. 복숭이의 짝꿍 장동건은 무슨 일인지 고민이 있는 것인지 안달했지만 사춘기란 갑자기 혼자 있고 싶다가 이유 없이 센티해 지다가 이유를 찾지 못하고 다시 밝아지고 그런 시기니까, 복숭이가 혼자 걷고 싶은 이유는 끝내 알 수 없었다.



학년이 바뀌고 반이 달라지면서 넷은 둘이 되었다. 나와 설희는 여전히 서로 기다렸다 함께 하교했는데 설희는 일부러 30분쯤 걸어 멀리 우리 집 근처 정류장에서 버스를 탔다. 시장을 가로질러 걸으면서 호떡이나 떨이 과일을 사 먹었다. 순례길에서 반복적으로 마주치는 순례자들처럼 우연히 다른 친구들을 만나면 뭉쳐서 분식집을 털어먹었다. 종종 설희는 ‘나 너무 졸리니까 자면서 걸을께’라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잔다와 걷다는 동시에 할 수 없는 일이니까 곧 눈을 뜰 거라고 생각했지만 설희는 넘어지지도 않고 곧잘 걸었다.


더 멀리 거슬러가면 중학교 때 우리 다섯은 사는 곳도 집에 가는 방향도 달랐지만 굳이 같이 걸을 수 있는 길을  만들어서 분식 포장마차 들렀다. 그 돈이 다 어디에서 솟았는지 매일 떡꼬치와 어묵을 사 먹고 KFC에서 감자튀김을 산처럼 쌓아놓고 먹었다. 종일 같이 지내도 학교밖에서 시간을 보내야  비로소 친구가 된다는 듯이 어울려다녔다.


교회 청년부 친구들과 수시로 무리 지어 갈어다니기도 했다. 집 방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집에 가기 싫은 사람들끼리. 놀고 싶고 시간이 많은데 그런 순간이 불쑥 찾아와서 어쩔 줄 모르는 젊은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통하는 농담을 해대면서 누구의 말이 상대방 가슴을 쿡 찌르는지 모르고 설익은 친목을 다졌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고도 같이 걷는 사람들이 있었다. 회사 입구를 나서면 각자 다른 방향으로 걷게 되는데 또 ‘이모네’ 분식집을 거치듯 이자카야를 거쳐 집으로 가는 길을 늘려버렸다.



소식이 끊겨버렸지만 좋은 선생님이 된 지 십여 년 쯤 되었을 설희와 장동건, 똑순이 과장님쯤 되었을 복숭이, 연구원, 사장님, 엄마 생활 잘하고 있는 분식 포장마차 동지들, 직업 고민이 치열한 퇴근길 동지들. 종일 같이 있던 사이인데 굳이 집으로 가는 짧은 길 위에서 시간을 공유했다. 같이 걷는다는 건, 같이 먹는다는 것만큼 의미 있는 일이었다.


친구와 강화도 유명한 절에 다녀온 날이 있었다. 정한 바 없이 떠돌고 싶은 날이었다. 보문사인지 전등사인지 기억도 잘 안 나지만 의도치 않게 길을 헤매던 차가 마침 근처를 지나게 되어 불쑥 들렀다. 성의 없이 시선을 던졌던 풍경은 기억이 안 나고 우리가 얼마나 회사 다니기에 부적절한가, 회사는 또 얼마나 부조리한가를 주거니 받거니 하느라 바빴다. 그날 떠돌이처럼 걸어 다니면서 속에 쌓아두었던 화를 다 털어내었더니 밤에는 간만에 깊은 잠을 잤다. 코를 골았을지도 모른다.


같이 걸은 횟수만큼 우리는 겹쳐졌다. 아무 말이나 늘어놓으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화학조미료 맛 대화를 뿌리고 가끔은 중요한 선택을 두고 머리를 모았다. 그러다 보면 좋은 날도 있었고 어색한 다툼도 생겼다. 그러면 한동안 따로 걷다가 다시 어색하게 같이 걸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졌다. 퇴근길에 한 시간은 거뜬하고 두 시간도 걸을만했다. 길 위에서 잡다한 생각이 앞뒤 없이 꼬리잡기를 했다. 쓸데없는 생각이 대부분이지만 그래서 머리가 쉬는 것 같았다. 머리에서 쉬이익 하고 김이 나면서 열기가 식는 모양이 그려졌다.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앞으로도 같이 걷는 시간보다 혼자 걷는 시간이 많아질 것 같다. 바삐 살다 멀어져서 그리운 친구들, 가끔 만나도 할 말이  특별히 많지 않을 만큼 수시로 통하는 친구들. 집으로 향하는 길이든 목적지 없는 길이든 같이 걸었던 시간이 많아서 다행이다.   시간 덕분에 혼자걸어도 즐거운 오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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