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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31. 2019

내 마음의 보석상자

먼 옛날 플로피 디스켓이란 것이 스치듯 존재했다. 왜 잠시만 존재했는지는 이제 설명할 것이다. 그놈은 제대로 읽히는 날보다 오류가 발생하는 날이 더 많았다. 내 PC에서만 멀쩡히 작동하고 교수님 PC에선 먹통이 되는 발칙한 디지털(이라고 부르지도 말아야 할) 기기였다. 덕분에 과제를 제출할 때마다 파일을 두 개의 플로피 디스켓에 저장했다. (몹쓸 낭비.)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지 모르는 심정이랄까. 반짝하고 지나간 플로피 디스켓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뒤 이어 등장한 CD를 나는 믿었다. 겉보기 등급도 플로피 디스켓 따위보다 믿음직스러웠다. 반짝이고 견고한 동그라미 판에 담으면 철통 보안될 줄 알았지. (내가 또 어리석었어.)  부지런히 구워둔 사진과 노래들은 봉인된 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지 수년째다. 지키려고 한 것인데 가둔 꼴이 되었다. CD에겐 잘못이 없다. 지워지지 않게 잘 담고 있었건만 세상이 열쇠를 감춰버렸을 뿐. 노트북은 살을 빼느라 CD 리더기를 뺐고 집엔 PC도, 90년 대생들은 본 적도 없다는 CDP도 없고. 플레이할 수 없는 카세트테이프처럼 열어볼 수 없는 CD들이 누군가 찰칵하고 닫힌 문을 열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몇 년 전, 10년간 일기를 남기던 사이트가 문을 닫는다며 ‘빨리 저장하세요.’ 하고 공손한 협박 메일을 보냈다. 얼마 후 사이트는 예고 한대로 백업 파일이란 것을 툭 던지고 문을 닫아버렸다. 백업이라고는 했지만 허술하고 형식적인 파일들은 20대를 오롯이 담은 일기에 적합한 마지막 예우가 아니었다. 외장하드에 넣어버린 백업된 일기들은 이후 거의 열어보지 못했다. 수천 개나 되는 파일 더미를 보며 어떻게 감상에 젖을 수 있겠어. 폴더를 열자마자 화딱지가 나는걸.


외장하드에 넣어둔 기록물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고장 나서 읽을 수 없는 플로피 디스켓처럼 오류가 나면 수백 기가의 저장물은 그 안에 갇혀 영원히 세상에 나오질 못하는데. 이미 그런 일을 여러 번 겪어보았지 않은가. 이쯤에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지금보다 두배 늙었을 때 심심하지 않게 읽을거리를 만들어두려면 일기는 종이에 쓰고 사진은 인화야 한다.


가끔 놀러 가는 친구네 집에는 규칙이 있다. 집을 나서기 전까지 방명록을 써야 한다. 갈 때마다 알맹이 있는 말을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말이라도 시간이 익혀주면 저절로 의미가 될 거라는 마음으로 몇 줄 남긴다. 고전적이지만 가장 오래 남을 방식이다.



나에겐 오래된 보물상자가 하나 있다. 특별히 더 잘 보관하고 싶은 물건들을 담아둔 상자인데, 말 그대로 보물상자 모양이다. 다마스쿠스 재래시장에서 2만 원에 산 보물상자 안에 담긴 것은 제법 희귀한 동전들과 외국어로 쓰인 편지와 누군가의 사진, 스티커와 머리끈, 어느 나라로 가는 비행기 티켓과 읽을 수 없는 글자가 인쇄된 브로셔. 커피믹스 같은 것들이다.


커피믹스, 다 늘어진 머리끈은 왜 넣어두었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버리지 않는 이유는 그때 소중했던 어떤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무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 소중했던 것이 지금도 소중한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소중하지 않다고 나중에 소중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니까. 게다가 요즘 같은 기억력이라면 뭐가 소중한 지조차 제대로 판단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가끔은 어릴 때 가지고 놀던 마론인형과 호돌이 인형, 초등학교 교과서(특히 우리들은 1학년 같이 의미 있는 책)를 왜 남겨놓지 않았을까 후회하는 바, 지금 판단으로 과거의 기억될만한 것을 버리지는 말아야겠다.


기억의 불안정성은 학자들이 충분히 증명했다. 나의 경우엔 기억에 의지하기가 출렁다리를 걷는 것처럼 불안하다. 그래서 저장이 더욱 소중한데. 디지털 기기마저 이런 상황이니. 불안한 저장과 불안한 기억을 모두 데리고 살기가 퍽 곤란하다.



유시민 작가님은 일정 나이를 넘으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혹은 "내 기억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 속에 산지 이미 오래되었다. 단순화된 핑계도 생겼다. '제대로 기억할 만큼 중요하지 않았다보다'. 말했듯이 다 핑계다. 저장이 더 간절해진 최근 몇 년 사이, 나는 잊고 싶지 않은 것과 잃고 싶지 않은 것이 늘다. 그리고 지금 깨달았다. 결국 저장이 늘었다는 건 아쉬움이 늘었다는 말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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