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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Sep 15. 2019

이름표를 붙여 내 가슴에

요나슨 요나손, 베르나르 베르베르, 에릭 에릭슨 같은 이름들은 작가가 되기로 약속한 걸까. 아님 작가가 될 운명을 타고나면 그런 이름을 얻게 되는 걸까. 일찍이 헤르만 헤세가 그런 류의 시작인 것 같다. 어떤 이름은 태어날 때부터 직업을 예견하는 것 같다. 슈마허는 누가 봐도 레이서고 우사인 볼트는 이미 세계 1등 육상 선수 이름이다. 친구들아 봤지? 혹시 자녀가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바란다면 이름부터 잘 지어줘야 해. 이름 안에 직업이 숨어있단 말이야. 특히 작가로 키우고 싶다면 유상무상무상 같은 이름을 절대 흘려버리지 마.


어떤 이름은 들으면 딱 그 사람답다는 느낌이 든다. ‘이름과 사람을 어울리는 것끼리 짝지으시오’ 하고 문제를 낸다면 80% 정도는 제 이름을 찾아 짝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오랫동안 불리다 보면 이름에 걸맞은 사람이 되는 걸까. 이름이 사람을 길들이는 걸까. 오래된 부부가 서로 닮아가는 것처럼.  


이효리는 ‘이효리’처럼 생겼고 이동진 기자는 ‘이동진’처럼 생겼다. 유재석에게 강호동이란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 학창 시절에 ‘김은정’이는 애가 있었다. 새 학기 첫날 짝꿍이 “넌 김은정처럼 생겼어.” 라면서 김은정이라고 부른 후에 그냥 김은정이 되었다. 그런데 정말 그 친구는 김은정처럼 생겼고 지금도 본명은 생각이 안 난다.

 


사인받으시면 헌책방에 팔 때 값 떨어져요.


내가 좋아하는 작가님은 사인할 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 사실이다. 중고서점에선 유명인사의 사인북이라고 값을 더 쳐주진 않는다. 오직 작품의 가치만 보는 엄정한 바코드가 “삑” 공정한 감정가를 편견 없이 내놓는다. 내 방에는 사인도 받지 않아 깨끗한데 작가가 물의를 일으켜 차마 팔 수 없게 돼버린 책들이 있다. 차라리 사인북이라 값을 덜 받는 편이라면 나았을 텐데. 


내가 가진 몇 권의 사인북은 대리인이 받아준 것이 대부분이다. 그때도 좋아하는 작가님을 만나 사인 요청 같은 걸 할만한 용기가 없었다. (연예인을 만나는 것과는 다른 긴장이 있다.) 혹시 운수대통으로 그분들 중 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될 날이 있을까 봐 가방에 한 권쯤 상시로 넣고 다녀야 하나 생각한 적도 있지만, 역사이래 그런 행운은 나만 비껴가는 법. 괜히 무거운 수고는 하지 않았다. 



학창 시절엔 한 반에 같은 이름을 가진 애들이 꼭 몇 명씩 있었다. 공식적으로는 큰 미영이 작은 미영이, 미정 A, B, C로 불렸지만 친구들 사이에선 어차피 별명으로 불려서 이름이 같다는 건 불편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흔하다면 제법 흔한 이름이었던 지라 나도 학년이 바뀔 때 같은 이름이 있을까 봐 긴장하곤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통계적으로 평범한 이름을 가진 부모님들이 아이에겐 특별한 인생을 선물하고 싶어서 특이한 이름을 짓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반대로 이름이 특이한 부모들은 아이가 불필요한 관심으로 고통받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범한 이름을 짓는다. 그렇지만 평범한 혹은 전형적인 삶을 살아온 부모가 특이한 이름을 지어준들 부모의 전형적인 양육방식 아래 자란 아이는 이름만 특이해서 고통받게 된다니. 안타깝다.   


어떤 이름은 만나본 적 없는데 좋아하기도 한다.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명은 나중에 아기를 낳으면 이름을 ‘이슬’이라고 짓겠다고 했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이 씨를 만나야 한다. 특별한 미션이다. 



이름엔 약속이 있다. ‘책상은 책상이다’라는 책에서는 약속을 깨고 이름을 바꿔 부르기 시작한 남자가 나오는데 결국 누구와도 대화할 수 없어 혼자 고립되고 만다. 이름을 부른다는 건 약속을 공유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려 소통하고 싶다면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이름을 불러야 한다. 어떤 약속된 이름을 가만히 곱씹으면 귀여움이 솟아난다. 목도리는 누가 처음 이름 지었을까. 쓸모가 정확히 표현된 이름인데 귀엽기까지 하다. 신혼 첫밤을 꽃잠이라고 붙인 사람은 부부의 정이 좋았을 것만 같다.  어릴 때 자주 마시던 선키스트 주스의 뜻을 알고 나서는 이렇게 낭만적인 주스라니 감탄하기도 했다. 


인간의 삶은 약속된 이름으로 구성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수시로 불리는 내 이름, 물건의 이름, 매일 만드는 문서의 이름들. '보고서_완성, 보고서_진짜 완성, 보고서_이게 진짜' 같은  기계적인 이름을 붙여주어 미안해진다. '거의 잘 맞을 뻔했던 보고서, 인상적이었던 보고서, 기분 좋게 쓴 보고서'처럼 나름의 의미를 붙여주는 방식은 어떨지. 


그 많은 이름 중 내가 가장 자주 부르는 이름은 핸드폰 연락처 속 다섯 개의 별명처럼, 손가락 안에 꼽힐 것 같다. 가장 자주 소리 내어 부르는  이름은 역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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