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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Oct 30. 2019

그깟 공놀이


인생 첫 한국시리즈 직관이었다. 야구장 치킨도 처음이었다. 주말 낮 경기도 차음이었다. 아직 야구 규칙을 잘 몰라서 전날 주요 용어들을 찾아보기까지 했다. 이 티켓을 얼마나 어렵게 잡았는지. 지난 토요일 오후, 3인이 함께 사전 연습과 시뮬레이션을 하고 나서 겨우 차지한 티켓이었다. 그 티켓을 클릭으로 얻어낸 자가 바로 나다. 그게 신호였던 것 같다.


나의 사랑하는 작가들은 야구를 사랑했다. 특히 폴 오스터는 야구 규칙을 활용한 게임을 개발해서 판매해보려고 했고 (결국 실패했다.) 스퀴즈 플레이라는 소설도 썼다. 작가님, 저도 이제 야구 좋아합니다. 너구리님은 처음으로 구단 후드티를 샀고, 진작부터 정해두었던 굽네 고추 바사삭 치킨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시점에 나는 지하철에서 우연히 버건디 남을 만났다. 버건디 구단 티셔츠에 깔맞춤으로 버건디 바지와 버건디 구단 모자까지. 이런 풀 창작은 존경해야 한다.


저 팀은 팬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쫄리게. 그래도 우리 쫄지 말자. 우리 팀 오늘 잘하겠지. 빨리 들어가서 치킨 먹고 싶다. 음료수도 살 거야? 우와! 그래도 안에 들어오니까 신나. 오늘은 이길 거지? 나 고추 바사삭은 처음이야. 이 소스 맛있네, 떡볶이 양이 적어. 장성규 시구 재밌네. 저 시구처럼 되는 건 아니겠지. 저 우승 트로피를 들고 와버렸네. 그래도 쫄면 안된다.  



치킨은 진작 1회 만에 끝이 났다. 사실 그걸 왜 1회 때 먹었는지 후회했다. 5회부터 7회 사이에 먹었어야 했는데. ‘내가 어제는 무사 만루를 위키피디아로 찾아보고 어리둥절해졌는데 오늘은 그런 거 검색할 일 없겠지.’로 시작된 경기는 느낌이 좋았다. 느낌이 좋은 와중에도 불안하게 쫓기는 기분. 아무리 4점을 앞서도 불안한 기분이었다. 한 점 세 점 촘촘히 따라 잡히고 결국 역전으로 뒤집힐 때 아, 올게 왔구나 했지.


결국은 결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년 만 한국시리즈 진이었다. 9회에서 차라리 경기가 끝나야 내 심장이 남아나겠다 싶었지만 9회 말의 동점은 짜릿했다. 앉아서 볼 수 없는 심장 간지러운 경기 때문에 야구의 세계에 공식적으로 발을 넣어버렸다. 결정적 순간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78년 요구르트와 히로시마의 경기를 도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보던 중, 외국인 선수였던 데이브 힐튼 선수가 2루타를 치는 순간 소설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했다.

나는 2019년 한국시리즈 4차전 두산 베어스와 키움 히어로즈의 경기를 고척돔에서 보던 중, 9회 말 2사 만루에서 서건창이 동점 적시타를 치는 순간 히어로즈 팬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10회에서 경기는 끝났고 옆에서 축포가 터지고 있었다. 어휴 경기가 10분만 더 길었으면 내가 심장 터져 죽었겠어. 싶어 털썩 앉았다. 두산 선수들이 얼싸안고 뛰며 단체 셀카를 찍고 기쁨을 자랑하는 동안 나는 봐버렸다. 우리 팀 선수들의 뒷모습. 그건 다 그냥 자리 때문이었다. 뒷모습이 보이는 자리였을 뿐이었는데. 내가 이 뒷모습을 보려고 연습까지 하면서 내 손으로 티켓을 잡았던가. 서건창의 적시타와 뒷모습에 나는 K.O 가 되었다. ‘우리 팀 수고했다.’ 경기 규칙도 아직 제대로 모르는데, 이렇게 시작되나 보다. 나의 야구는.



집으로 오는 지하철 옆자리에 버건디 셔츠 입고 이정후 선수 플래카드 만지작 거리는 소녀가 있다. 나도 버건디를 입었더라면 두배로 짠할 뻔했다. 무엇보다 치킨 한 마리로 6시간 경기는 무리였지. 집에 오자마자 삼계탕 반 그릇, 사과 한 알을 싹 해치다. 침대에 누워 3월부터 다녀온 몇몇 경기를 되새겨보았다. 중간중간 울분이 터지는 경기들이 생각나다가 또 지난 17일 SK를 1:10으로 이기던 날이 마지막으로 생각나 기분이 좋았다. “I hate you but I love you.” 그런 모순의 세계라고 했다. 나를 이곳으로 안내해준 친구는. 그깟 공놀이의 소용돌이 속으로 온 것을 환영해주었다. 내년에도 우리 같이 그깟 공놀이 보러 가자. 그땐 나도 버건디 입고 싶다. 경기는 끝난 지 며칠째인데 입에 응원가가 맴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승리


언제 3월 된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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