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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an 13. 2020

어쨌거나 데뷔


지난해 마지막 예배 나는 과감하게 성가대 소프라노 지원서를 냈다. 그 후 2주간 소식이 없었고 동생이 깐족댔다. 과연 나는 서류 탈락인 것인가. 적어낸 것이름과 연락처뿐인데 글씨가 별로였나. 체를 반성하며 카페 공사로 바빠진 틈에 성가대는 슬쩍 잊으려고 했는데 토요일 밤 전화가 왔다.


둥둥이 청년. 시온찬양대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저 진짜 환영해주시나요? 글씨 때문에 서류 탈락한 줄 알고 떨었잖아요.) 환영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일에 뵙겠습니다.  


설레는 몇마디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은 첫날이고 요즘은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고 특히 오늘은 일주일치 피로가 최고조에 이른 토요일이다. 성가대 석은 좌석이 높아 눈에 잘 띈다는 점도 신경이 쓰였다. 졸면 안 된다는 강박으로 오늘만큼은 충분히 자야겠다 결심하고 10시 반에 소등했다.



여유 있게 눈을 떠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해본다. 평소라면 아침을 거르겠지만 성가대 연습 중엔 배가 고플 수 있어. 지금부터 예배가 끝나는 시간까지 공복이면 위험하다. 그렇지만 연습 중에 간식을 주실 지도 모르니까 든든한 식사는 피하자. 그렇다면 작은 고구마 하나로 아보자. 아슬아슬(?) 서류 통과했지만 차하면 현장에서 오디션 탈락할지 모르지 목을 위해 물이라도 마셔두자. 그러나 화장실너무 자주 가면 연습에 방해가 될 테니  반잔만.


이토록 치밀한 계산으로 물 반잔과 고구마 하나를 먹고 출발했다. 대장님이 어제 그러했듯 입구부터 모두가 두 팔 벌려 환영해주셨다. 어머 신입단원이래. 청년이다! 너무 좋다. 반가워요. 환영해요. 여기 앉아요. 여기 악보 책. 잘 부탁해요.


뜨거운 환영에 연신 허리 굽혀 인사했다. 쑥스럽게도 나는 성가대 최연소 단원이 된 것이었다. 아, 얼마만의 막내란 말인가. 그러나 이 나이에 막내란 것은 어쩐지 얼굴이 붉어진다. '제가 어린 청년이 아니라 최송 해요.' 사과는 마음으로만 하고 있었는데 진짜 얼굴 붉어질 일은 그 후였다. 잠 깬 지 두 시간도 안됐는데 높은 미, 파, 심지어 솔은 너무 하지 않은가요. 머리로 피가 쭉 오르는 기분이에요. 아, 이래서 힘내라고 미리 떡을 주셨구나. 다른 분들은 부담스럽지도 않은지 아침부터 쭉쭉 피치를 올리신다.



처음 만난 악보 앞에서 목소리는 끊어지는 와이파이처럼 서툰 노래와 묵음을 반복했다. 자신없어서, 몰라서, 너무 높아서, 힘에 부쳐서 자꾸 소리가 사라졌다. 굳이 핑계를 살짝 얹어본다. 비염인으로써 제가 지난주 송도의 추위와 공사현장 먼지와 맹렬히 싸우다 보니 목이 좋지 않아요. 그렇다한들 평소 실력이 크게 좋은 것도 아닌데, 핑계 넣어두자. 지휘자님 눈치를 보면서 자연스레 허리를 펴 노력하는 자세를 어필해본다.  


엄마, 노래 못하면서 성가대 한다고 놀려서 미안해. 나도 어쩔 수 없는 엄마 딸인가 봐.


하필이면 솔리스트 분 옆자리에 앉아버려서 목소리는 체급 대결에서 완전히 밀렸고 내가 과연 어떤 음을 내고 있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슬프게도 그 자리가 내 고정석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내 실력을 들키지 않을 좋은 자리일 거야. 지휘자님, 찬양 악보를 보는 것도 오랜만인데 rubato, gaspel swing 같은 건 제가 표현할 수 없어요. 아직은 어려워요. 죄송해요.


마음의 사과를 표현해보려고 설명하시는 휘자 님과 눈이 마주치면 그저 끄덕끄덕. 최선을 다해 끄덕거다. 악보에 적힌 “warlike”가 내 마음 같다. 다른 분들은 악보를 손바닥 위에 놓고 노는 누가 내 노랠 듣고 당장 나가라고 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신입이라고 초콜릿도 두 개 더 챙겨주시고 연필도 챙겨주시고 점심시간에 줄도 양보해주셨는데, 이모양이라 죄송해요.



오늘 찬양 그래도 조금 는 곡이라 다행이었다. 실수 없이 찬양을 끝내자 옆자리 솔리스트 집사님이 손을 잡으시며 “데뷔 축하해요.”라고 하셨다. 제가 데뷔를요? 데뷔는 집사님 같은 분에게 어울릴 말이고요. 제 노래를 듣지 않으셨길 바라요.


성가대는 생각보다 체력소모가 컸다. 어제 충분히 자두지 않았다면 노래도 못하는 사람이 졸기까지 한다는 첫인상을 남길 뻔했다. 연습 후 연습실 입구에서 부부 집사님이 큰 격려를 해주셨다.


3개월만 하면 쭉쭉 올라가고 잘할 수 있어요. 3개월만 고생해.


제 마음을 읽으신 거죠? 다들 처음엔 이렇게 시작한 거죠? 그런데 찬양은 왜 모두 이렇게 높죠? 저의 최선은 ‘레’인 것 같은데요. 3개월 지나면 저도 잘할 수 있는 건가요? 다음 주에도 잠 많이 자고 올게요. 오늘 모두 감사했어요. 앞으로 최선을 다해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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