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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12. 2020

위대한 뿌빳퐁커리

어떤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와 일하기를 꾸역꾸역 해냈지만 나는 있는 힘껏 그를 피해 다녔다. 가능한 방법들을 동원해 그와 같이 일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처음 그 회사에 들어갔을 때 같은 팀에 그가 있었다. 늘 혼자 도시락을 먹는 사람이었는데 그 이유가 나만 궁금한 건 아니었다. 평소 차분하고 인간관계가 두루두루 원만한 직원 한 분이 오랫동안 참았던 질문을 조심스레 던졌다. “반찬을 나눠 먹기 싫어서래요!”. 유레카! 예상치 못했한 답이었고 놀랍게 당당해서 경이롭기까지 했다.


프리랜서에서 9 to 6 정규직으로 이직하니 익힐 것이 많았다. 특히 우리 팀의 서열문화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한 번은 사무실 자리 이동 후 "서로 앉고 싶은 자리 정해서 앉으면 안 돼요?"라고 했다가 싸늘하게 비수처럼 날아와 꽂히는 시선에 찔려 죽을 뻔했다. 그때 나의 올바른 대답은 “차장님, 과장님들. 먼저 고르세요. 저는 남는 자리에 앉겠습니다.”가 되야했다.



내가 모시는 선임들은 위아래가 다소 많이 중요한 분들인 동시에 유별난 데가 있어서 출근 첫 주엔 인수인계도 서로 사양하는 편이었다. 결국 측은지심이 발동한 동갑 대리 H가 인수인계를 맡았다. 두 달 후엔 우리 팀이 주도하는 연중 최대 행사가 있었고 “타 부서들도 협력해서 전사적으로 진행하는 행사니까 부서 팀장님들께 협조 요청 메일을 돌려야 해요.” 하고 H가 일러주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고 정중하게 메일을 썼다. 아직 내 이름도 모르실 여러 팀장님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무례를 범치 않으려고 조심스러운 메일을 썼다. 선임들을 참조하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라 몇 번씩 리스트를 확인했다. 그런데 메일을 보내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그가 내 자리로 오더니 벌컥 화를 냈다.


대리가 건방지게 팀장한테 메일을 보냅니까?


어리둥절한 와중에 이 회사의 위아래 문화는 어디까지인가 가늠해보려고 머리를 굴렸다. 감히 대리가 팀장한테 메일을 보내서는 안 되는 문화. 왕에게 뒷모습을 보이지 않고 방을 나서는 궁인들처럼? 태국에선 스님들이 여자와 말을 섞을 수 없다는데 이 회사에선 대리가 팀장님과 말을 섞으면 안 되는 건가? 그럼 팀장님들과의 의사소통은 어떻게 하지? 메일도 못 보내는데 전화는 괜찮을까? 어떤 조직 문화인 거지? 혼자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였고 입사 전 알고 지내던 J에게 물었다.


언니, 이 회사는 원래 대리가 팀장한테 메일 보내면 안 돼요? 그게 건방진 일이에요?



당연히 그럴 리 없었고 그 사건은 그의 어이없는 신입 길들이기였다. 그를 시작으로 남다른 선임들의 텃세가 있었지만 그만큼 꾸준히 절대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결국 그런 날이 와버렸다. 그와 출장을 가게 되는 날. 나를 포함한 5명 중 싫은 사람은 그놈 하나뿐 인데도 출장이 망설여질 만큼 피하고 싶었다.


나 말고 3명이 더 있으니 쿠션 3개 끼고 다닌다 생각하자. 제발 무사히 다녀오게 해 주세요.


그의 무례와 건방은 출장 중에도 성실했다. 싫은 사람은 숨만 쉬어도 싫으니까 내 눈에만 미운점이 더 많이 보이는 걸까 생각했지만 그렇다고 예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동행 중에는 최근 팀장으로 승진한 D가 있었고 D는 그보다 한 살 어린 대학 후배였다. 그래서 발동한 열등감인지 질투인지, 그는 절대 D를 팀장님이라 부르지 않을뿐더러 슬쩍 말을 놓기도 했다. 못난 놈. 매일 그놈과 일정 소화하기가 순탄치 않았던 터라 우리는 아침마다 모여 트러블 없는 하루를 기원하 파이팅을 외쳤다. 하루는 D 그의 강점을 발견하는 하루를 보내도록 노력하자고 했다. 과연,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과연은 역시로 끝났고 다음 날 아침 D에게 물었다.


팀장님이 발견한 그의 강점은 뭔가요?
음.... 큰 강점이 없는 것이 강점입니다.
그렇구나...



일정은 매일 빡빡했고 이동이 많아 끼니는 길가에서 마주치는 식당에서 대충 때우곤 했다. 그게 대단한 불만이었는지 그는 차 안에서 몇 번 싫은 내색을 했다. 도시락 반찬 나 먹기 싫어 혼자 먹는 사람으로서 그럴 만하다. 그렇다고 우리가 태국까지 왔는데 끼니가 이래서야 쓰냐는 말을 귀담아듣고 싶지는 않았다. '일하러 왔지 먹으러 왔나. 쯔쯔쯔.' 그날도 길가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나와는 달리 그의 불만을 귀 담아 들었던 D 팀장님이 나름 규모 있는 식당으로 골라 들어갔다. 메뉴판이 컸고 당연히 선택지가 넓어졌다. 제법 격식 있는 테이블도 있어서 우리는 오랜만에 묵직한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태국 음식은 다 맛있지.’ 하며 대충 이런저런 메뉴를 시켰는데 누가 알고 시킨 것인지 우연인지 푸짐한 뿌빳퐁커리가 나왔다. 그 순간 그의 입에서 처음으로 그 말이 나왔다.


팀장님! 잘 먹겠습니다.



팀장님, 팀장님... 뿌빳퐁커리는 그런 음식이었다.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된 성경 속 남자처럼 뿌빳퐁커리가 입에 닿자 그 말이 터졌다. 아 위대하다. 뿌빳퐁커리. 신이 나서 자리를 옮겨 다니며 먹고 떠드는 그를 티내지 않고 힐끔거렸다. 뿌빳퐁거리의 능력을 보고도 믿기 어려웠다. 음식에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힘이 있다고 믿는 편이지만 이렇게 즉각적인 변화를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니까. 이 놀라운 간증을 꼭 널리 알려야지. 간증을 나누고 싶은 동료들을 떠올렸다. 그러나 동료들의 이름을 정리할 필요는 없었다. “팀장님”이란 말은 그 테이블에서 뿐이었으니까. 뿌빳퐁커리를 다 먹고 차에 오르자마자 마법은 풀렸다. 


뿌빳퐁커리 매직은 의외로 나에게 더 오래가는 듯하다. 태국에 갈 때마다 뿌빳퐁커리를 먹으면서 그 일을 생각한다. 뿌빳퐁커리와 팀장님의 연결고리. 이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서 그놈을 생각할 수밖에 없으니 그건 흑마술인 것 같다. 요즘도 맛있는 반찬 독점하며 혼자 즐거운 점심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그놈. 


<이미지출처: 영화 '블랙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지금 나는 한계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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