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에 영화를 가장 많이 봤던 몇 번의 시기 중 하나는 고등학생 때인데 시험이 끝나거나 휴일이 되면 꼭 단관극장에서 영화를 봤다. 혼자 영화 보기를 시도했던 것도 그때 즈음이었다. 시험이 끝나고 볼만한 개봉 영화가 없으면 일주일 동안은 비디오테이프를 하루에 서너 개씩 빌려서 보고 또 보고 반납하는 게 루틴이었다. CA는 영화감상으로 선택해서 토요일 CA 시간엔 비디오 한 편을 보는 재미도 즐겼다. 생각하면 그때 오히려 장벽 없이 다양한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아직 뚜렷한 취향이 없어서 그랬을까. 영화가 거의 유일한 유흥거리였던 때라 그랬을까.
그땐 뭘 모으는 취미도 조금 있던 터라 영화를 보고 나면 영화표에 날짜와 한 줄 정보(소감은 아니다.)를 적어 보관했다. 그중 일부는 용케도 아직 남아있다. 지금은 영수증처럼 긴 영화표가 나오지만 그때의 단관극장에서는 엄지손가락(내 손은 좀 크니까) 두 개만 크기의 영화표를 줬다. 검표도 허술해서 종종 영화를 보고 좌석에 잘 숨어있다가 다음 영화를 보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우리 엄마는 중간에 잠이 들어 다음 상영까지 연달아 자다가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동네 시내 가장 큰 영화관은 2층 구성이었는데 나는 주로 1층 앞 1/3 지점에 앉는 걸 좋아했다. 타이타닉을 볼 때는 좌석 간격이 너무 좁아서 세 시간 동안 다리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다는 (나보다 키가 6cm 큰) 친구의 충고를 따라 단단히 각오하고 들어갔었다. (각오만 했지 불편하지 않을 수 있는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내에는 극장이 4군데 있었는데, 그중 두 번째로 허름한 곳에서 98년도 ‘약속’을 봤다.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친구 한 명이 무려 세 번이나 봤다면서 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주말에 혼자 보러 갔다. 그 영화를 본다는 게 일종의 길티 플레져 같아서 누군가에게 같이 보자고 권하기가 그랬다. 최루성 멜로의 나쁜 점은 자존심 상하게 울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눈물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때 ‘약속’은 10대 여학생에게 먹히는 부분이 있었다. 내가 본 후에도 약속은 소문을 타고 더 크게 흥행했다. 1년 전 가을에는 비슷한 최루성 멜로 ‘편지’가 흥행했고, 1년 뒤 가을엔 ‘식스센스’가 대흥행을 했는데 1년 사이에 관객 취향이 달라진 걸까. 영화계 관계자들의 계산이 달라져 멜로 영화 개봉 시기가 바뀐 것뿐일까.
가을엔 ‘약속’을 봤고 그 전 여름엔 ‘아마겟돈’을 극장에서 세 번이나 봤다. 세 번 모두든 각기 다른 사람과 안 본 척 다시 봤다. 이상한 영화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그런 영화를 세 번이나 본다는 사실은 크게 내세우고 싶지 않았다. (‘약속’에 이어 ‘아마겟돈’까지 왜 자꾸 감추면서 영화를 보게 되는 것인지 참.)
그때 봤던 영화들이 참 다양하고도 많았다. 파워 오브 원, 뮤리엘의 웨딩, 굿윌 헌팅, 하드 레인, 아름다운 비행, 단테스 피크, 라빠르망, 그랑 브루, 페이스오프, 닥터 K, 올가미,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 타이타닉, 시티오브엔젤, 딥 임팩트, 여고괴담, 뮬란, 라이언 일병 구하기, 처녀들의 저녁식사, 트루먼쇼, 마요네즈, 쉬리, 셰익스피어 인 러브, 패치 아담스, 건축무한 육면각체의 비밀,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 노팅힐, 미이라, 주유소 습격사건, 애나 앤드 킹, 해피엔드. 끝도 없이 꼬리를 물고 영화 이름이 나온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감수성이 활짝 열린 시절에 마침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지난 것, 그덕에 어떤 영화들을 개봉관에서 봤다는 건 관객으로서 축복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닥치는 대로 보면서 시간을 보낸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그 덕에 지금 취향이란 게 좀 생겼을 테니까. 그렇지만, 하드레인을 보면서 '와, 진짜 하드한 레인을 보려고 내가 주말 오후 여기에 앉아있구나.' 한숨쉬고 '닥터 K'를 보면서 예고편에 완전히 낚였네 콧방귀를 뀌고 소녀감성에 '시티오브엔젤 첫장면부터 눈물콧물 줄줄 흘리고 굿윌헌팅을 비디오테이프 닳도록 돌려보던 과거의 나보다 지금 내 취향이 괜찮다고는 못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때라도 닥치는 대로무언가를 해보는 건 꽤 도움이 된다.(닥치는 대로먹는 것 빼고.) 가리는 게 많아지기 전에 닥치는 대로읽고 쓰고 배우고. 미래의 어떤 날에 닥치는 것들을겪어볼 힘도 과거에 닥치는대로 해본 짬빠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지금 '약속'을 다시 보면 그 영화가 어떻게 보일까. 나는 그때보다 제법 컸는데. 처녀들의 저녁식사를 다시 보는 편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싶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