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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Feb 28. 2021

당첨은 향기를 남기고

인생의 당첨운이 한꺼번에 터진듯한 해가 있었다. 라디오에 사연이 밥먹듯 당첨되고 좋아하는 DJ의 오프닝 전화 연결에 당첨돼서 라이브로 신청곡을 듣는 인상적인 경험도 했고, 수십 년째 팬질하는 가수의 콘서트 티켓에도 당첨되고, 노래 잘하기로 손꼽히는 보컬그룹 콘서트에도 당첨되고, 당첨운이 이렇게 없을까 싶은 평생을 살다가 장맛비처럼 쏟아지는 당첨에 신바람 나는 한해였다. (그때 당첨 운을 다 쓴 것 같아 지금은 좀 아쉽다.) 평생 당첨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내 인생이 맞는 건가 싶게 당첨, 당첨, 당첨의 화려한 1년 이었다. 이젠'신화'가 되어버린 아주 먼 옛날의 일이다.


당첨은 입금, 쾌변과 함께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단어 중 하나다. 입금, 당첨, 쾌변. 이 세 가지를 수시로 누릴 수 있다면 인생의 웬만한 고통은 이겨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세가지 모두를 비껴간 지난해 여름은 무척이나 잔인했다. 기나긴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면서 불안심리도 커지고 자존감도 낮아져서 종종 퇴근길에는 눈물이 찔끔 나기도 했다. 그때 그냥 회사를 계속 다녔어야 했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한 건 아닐까를 매일 생각했다. 그 이후로 서서히 감정의 진흙탕을 빠져나오기까지 지난한 시간을 보냈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나왔던 그 말,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을 냅시다.” 같은 마음으로 버텨내고 있었다. 



지긋지긋하게 조용한 8월의 어느 날, 가게에 앉아 핸드폰을 만지다가 인스타그램에서 가족사진 이벤트를 발견했다. ‘우리도 가족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으니까 한 번쯤?’하는 생각으로 참여했다. 그렇다고 당첨되고 싶었던 건 아니고 그냥 할 일도 딱히 없었고 생각 없이 손이 움직인 것뿐이었다. 그런데 그게 덜컥 당첨이 될 줄이야. “당첨되셨습니다.”라는 꿀처럼 달콤하고 생수처럼 시원한 그 말을 얼마 만에 듣는 것인지. “정말요? 제가 당첨된 거예요?” 그런 장난 전화가 있을 리 없는데도 꼭 이렇게 확인한다. 당첨된 사람의 호들갑은 소식을 전해주는 사람도 기분좋게 하는 법이니까. 나도 당첨 소식 전하는 전화를 몇 번 해봤던 터라 이런 전화를 받을 때는 아낌없이 기분 좋은 티를 내버린다. 이 전화 한 통이 오늘, 아니 올여름의 나에게 가장 좋은 일 중 하나라는 건 사실이었고 내가 얼마나 행복해졌는지를 충분히 알리고 싶었다. 가족사진을 찍을 기회가 생겼다고 당장 가족 단톡 방에도 알렸다. 뜻밖의 수확에 가족들이 제법이라고 치켜세워 주었다.



사진 찍는 날 엄마는 곱게 메이크업도 받고 어색하게 카메라 앞에서 어쩔 줄 몰라했다. 갈 길을 잃은 발이며 어디에 두어야 할 줄 모르는 손, 웃고 싶은데 맘처럼 웃어지지 않는 입. 그 와중에도 포토그래퍼 선생님은 용케 순간을 포착해서 멋진 사진을 찍어주셨다. 가족사진을 가지는 것도 좋지만 엄마의 제대로 된 전신사진을 액자로 뽑았다는 게 뿌듯했다. 사진을 찍고 나서 스튜디오 앞 태국 요릿집에서 기분도 냈다. 태국 음식을 먹으면서 우리가 몇 해 전 끄라비 여행에서 얼마나 재미있게 즐겼는지 또 이야기했다. 


사실 숨겨진 당첨이 하나 더 있었다. 제주여행 항공권과 렌터카 당첨! 대인배답게 동생에게 양보했지만 돌고 돌아 그 여행권은 다시 내 손에 들어와 있다. 동생이 파트너로 정했던 면허증 가진 친구에게 사정이 생겨 함께 여행을 갈 수 없게 된 것이 그 사정이다. 


버섯머리 언니랑 다녀와.



버섯머리와 제주여행을 갔던 것이 벌써 6년쯤 된 것 같다. 사진을 엄청나게 찍어놓고 버섯머리가 메모리 카드를 잃어버려서 기억에만 남은 제주 여행인데 재미있었던 기분만은 흐려지지 않는다. 그래, 제주도에 다시 가야겠다. 버섯머리는 그 사이에 면허가 생겼고 차가 있으니 제주 안 쪽으로 들어가 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당첨이 가져온 좋은 일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제주 여행을 갈 때까지, 아니 6년 전 제주여행을 아직도 곱씹는 것처럼 6년 정도 당첨으로 다녀온 제주 여행을 이야기할 때까지 당첨의 기운은 지속될 것이다. 그뿐인가, 가족사진을 꺼내볼 때마다 당첨 얘길 반복하겠지. 그러니 대체 당첨의 유통기한은 얼마나 긴 것인가. 당첨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증명되는 순간이다. 


가족사진 덕분에 무기력했던 8월이 조금 가벼워졌고, 버섯머리와 함께할 여행에 벌써 두근거린다. 당첨이 너무 오랜만이라 더 달콤하다. 8월의 당첨은 이렇게 오래오래 향기로울지, 자신도 몰랐겠지? 올해도 이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해주는 좋은 당첨, 꼭 다시 당해버리고 싶다. 


<이미지 출처: 영화 '굿모닝 프레지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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