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결정을 앞두고 혼란스러웠던 때였다. 결국 혼자 결정할 일이지만 친구들에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을 늘어놓은 이유는 그렇게 감정을 털고 나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날 내가 너무 주절거렸다는 걸 깨닫는 동시에 상처를 받았다. 내 이야기를 잠시 듣다가 친구가 말을 잘랐기 때문이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게 뭐야?
문자로 옮겨놓으면 그리 상처 받을 말이 아닌데, 목소리에서 귀찮은 기색이 진하게 풍겼다. 순간 우리 사이에 갑자기 벽이 툭 내려온 것 같았다. 눈치 없이 떠들고 있는 스스로가 부끄럽고 무안해서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내가 너무 귀찮게 했나. 우리 그렇게 친하진 않은 걸까. 서로 생각하는 관계의 깊이가 다를 수 있겠다.’ 등등 생각은 갑작스럽게 친구와 나의 관계로 옮겨 붙었다. 직접 얼굴을 보고 이야기했다면 이런 오해 아닌 오해는 없었을지도 모르는데. 어쨌든 마지막은 ‘전화하지 말걸.’ 하는 생각으로 끝이 났다.
열일곱 설희는 우는 친구를 달래주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이 모여들어서 "왜 울어?" "울지 마"라고 할 때 설희는 "그런 거 묻지 마. 그냥 울 수 있는 시간을 줘."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그래 정말 필요한 위로는 이거야.’하고 생각했다. ‘울지 마’는 주변 사람들이 하고 싶은 말이고, 당사자가 원하는 건 ‘울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내가 원했던 건, 내가 이야기를 흘려보낼 시간이었는데 친구와 나의 언어가 달랐던 탓인지 친구는 그 시간을 주지 않았다. 어쩌면 내 전화를 받기 전에 상사로부터 심한 질책을 들었거나 거래처 사람과 불편한 통화를 했을지도 모른다. 친구에게도 어떤 시간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모든 걸 뒤늦게 추측으로만 이해해야 한다는 건 그날의 통화가 어떤 식으로든 아쉬웠다는 뜻이다.
확실히 말과 행동보다 시간을 주는 것이 위로가 될 때가 있다. 2008년 3월의 어느 날. 다들 나를 그만 좀 괴롭히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4층 편집실 소파 틈 사이에 핸드폰을 내던지다시피 깊이 밀어 넣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했다. 왜 우리 팀엔 막내가 나 하나뿐인지 원망스러웠다. 제작비 탓이라고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버거운 상황을 알면서도 일을 시킬 땐 모른 척하는 선배들도 미웠다. ‘언니는 내가 싫죠?’ 하고 물을 것도 없이 나는 미움받고 있었다. (사랑도 미움도 동시에 받고 있었지만, 그때는 미움받는 쪽으로면 확대경을 대고 있을 때였다.) 모니터에 보안창을 왜 달았느냐, 모자를 왜 쓰고 왔느냐, 왜 외투를 벗지 않고 앉아있느냐로 싫은 소리를 하는 건 악의가 아니고는 불가능하지 않나. ‘내가 더러워서 그만둔다.’를 매 순간 되뇌면서도 그만두지 못하는 나를 원망했다. 그때는 사무실 책상보다 편집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꼴 보기 싫은 얼굴들과 나를 분리하기 위해서 "왜 또 편집실에 갔대. 거기에서 뭐 한대?"같은 말 나올 것을 알면서도 편집실을 포기할 수 없었다. 편집실이 아니면 정말로 '더러워서 못 해 먹겠네!"하고 오늘 당장 그만둬 버릴 것 같았다.
아무도 나를 찾지 말았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며 편집실에 앉아서 끄억끄억 울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조연출이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다." 하더니 아카이브를 뒤져 연주곡을 하나 틀어주고 나갔다. "실컷 울어라. 이 노래 끝날 때까지만 울고 일해." 하며 남긴 연주곡은 바로 Maksim Mravica의 <claudine>이었다. 4분 남짓한 시간 동안 실컷 울고 나니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 정해진 시간만큼 서러워하고 다시 keep-going 할 수 있게 친구가 연주곡만큼의 시간을 준 것 같았다.
시간을 준다는 건 중요한 관계의 기술이다. 특히 나에겐 제법 잘 먹히는 기술이다. 몹시 화가 나 있을 때도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이다. 혼자 화를 식힐 시간을 주면 쓸데없이 타올랐던 노기를 가라앉히고 상황을 조금 덜 주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인디언들은 화가 나면 화가 풀릴 때까지 걷는다고 한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를 반성한다고 한다. 인디언들이 걷는 시간처럼 나에게도 시간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화가 날 때 누군가에게 “잠시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라고 말하기는 어쩐지 우습다.
시간을 주는 것과 비슷한 결로 듣는 귀가 되어준다는 건 어려운 일이다. 나도 친구들과 대화하다가 나만의 생각에 빠지는 일이 왕왕 있다. 귀는 열려있지만 마음까지는 열려있지 않아서 제대로 들어주지 못하는 게 미안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또 가끔은 잠깐 들어도 피곤해서 눈 밑이 푹 꺼지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럴 때면 ‘어제 별거 안 했는데 왜 피곤하지?’하고 또 딴생각을 한다. 그래서 들어주는 귀가 고맙다. 가끔 급발진하는 바람에 우다다다 수다스러워지는 나에게 브레이크를 걸지 못할 때조차 차분히 들어주고 진심으로 끄덕여주는 친구들에게 고맙다. 들어주는 것 역시 나에게 시간을 주는 일이니까. 관계를 잘 만드는 건 결국 많은 의미에서 시간을 주는 일인가 보다. 생각할수록 정말 그렇다. 나도 시간을 주는 사람일까? 이미 미안하네.
<이미지 출처: 영화 '비뚤어진 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