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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30. 2021

서랍을 열고 싶은데

여행지의 숙소에 도착하면 혼자 즐기는 놀이가 있다. 설레는 마음으로 침대 옆 서랍을 여는 일이다. 누군가 두고 간 물건이 있기를 기대하며, 그래서 잠시 탐정이 된 기분으로 이전 투숙객의 정보를 상상해볼 기회를 얻기를 기대하며 서랍을 연다. 거의 성공하는 일은 없다. (성실한 메이드 분들.) 가끔은 나처럼 괜한 호기심으로 서랍을 열어보는 사람을 위해 (무사히 메이드 분들의 손을 피할 수만 있다면), 혹은 낯선 언어로 쓰인 책에 관심을 보일 여행자를 위해 호텔 서랍에 다 읽은 책을 일부러 두고 오기도 했다.      


혹시 모르잖아. 나 같은 사람이 있을지. 그러니까 내가 기대했던 설렘을 누군가의 서랍에 넣어주었다. 책 대신, 그 서랍의 위벽이나 안벽에 'tonight 11:58 northeast of the window' 같은 걸 적어서 붙여놨다면 더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에거서 크리스티 추리극을 체험할 기회를 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장난 한번 해볼 걸. 이렇게 여행이 비일상이 되는 날이 올 줄도 모르고 안일했다. 역시 할까 말까 망설여진다면 하는 게 맞는가 보다.    

  


여행지 숙소의 서랍은 도착해서 열어보기까지의 설렘을 즐기는 용도 외엔 거의 사용하지 않는 편이다. 내 정신머리로 중요한 물건을 넣어두고 그냥 체크아웃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서랍을 쓰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모든 물건은 슈트케이스를 밖을 잘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생각하니 모순적이나 누군가의 모험을 위해서라면 서랍을 적극 사용해서 뭐라도 두고 오도록 기회를 열어두는 게 맞지 않나 싶은데. 그래도 중요한 물건을 잃어버리는 건 안 되는데.     


그런 예기치 않은 순간을 좋아한 지 오래된 것 같다. 아주 아주 먼 과거에는 친한 동료들의 서랍을 열어 몰래 쪽지와 간식을 넣어두고 퇴근하기도 했다. 여행지의 서랍에서는 설렘을 기대하고 일상의 서랍에는 몰래 기쁨을 넣어두었다. 뭐가 들었는지 다 알고 있는 서랍에 낯선 무언가를 넣어두면서 내가 더 신이 났던 것 같다. 일상에 그런 장치들이 필요하다. 불쑥 나타나는 이벤트.   

   


꼬리에 꼬리를 물고 더 멀리 거슬러가 본다. 여고생들은 필요한 게 뭐 그렇게 많은지 양 손 넣으면 꽉 찰 것 같은 책상 서랍으로는 부족하다. 우리 학교에서는 의자 아래 바구니를 하나씩 두는 문화가 있었다. 심지어 두 개씩 두는 애들도 있었다. 선생님들은 교실에 지나다닐 자리가 없으니 바구니를 좀 정리하라고 성화였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이미 확장된 자아가 된 바구니를 치우라니. 하지만 가끔은 선생님들이 진저리 치는 것도 이해가 될 만큼 엉망으로 물건을 쌓아 올린 바구니도 많았다.      


가끔은 옆 반 친구네 놀러 가서 그 바구니 안에 언제 발견될지도 모를 쪽지를 툭 던져 넣기도 했다. 바구니를 정리하거나 뒤지다가 발견하는 언젠가를 위해서. 그럼 또 어느 날 내 바구니에서 답장 같은 쪽지를 발견하게 되기도 했다. 일상에 필요한 이벤트를 스스로 생산하는 여고생이라니. 나 꽤나 주체적인 편이었나? 어쨌든 그 여학생, 지금은 서랍이든 수납박스든 양념 같은 낭만 전혀 없이 완전히 기능적으로만 사용하는 생활형 인간으로 살고 있다. 낭만 부족형 인간의 치료를 위해 지금 가장 열어보고 싶은 건 역시 여행지 숙소의 서랍이다. 영어 성경이 들어있던 아프리카 호텔의 서랍이든 그 외 주로 텅 비어있던 남의 나라 호텔의 서랍이든, 열고 싶다. 여행을 잃은 일상이 너무 오래가고 있다.      


<이미지 출처: 이케아 옷장에서 시작된 특별한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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