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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Jul 24. 2021

여름, 추억 공백기

뜨거운 계절에 정신은 속절없이 미지근해진다. 제로섬 게임처럼 한쪽에서 열기가 에너지를 독점하면 다른 쪽은 에너지를 잃는가 보다. 올여름 열기는 살인적이고 그만큼 나의 에너지는 큰 폭으로 줄었다. 아무리 더위를 안타는 체질이라도 이제 냉방기기 없는 여름은 불가능하다. 여름철 평균기온이 해마다 오르고 있고 찜통더위란 말도 식상한 지 올해는 “압력밥솥”이란 표현이 등장했다. 듣기만 해도 곧 빵 터질 것 같아 무시무시하다. 여름 기온이 오르는 동안 나의 에너지 총량은 그것과 함께 시간에 반비례해 꾸준히 줄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날 뿐 아니라 기가 빨려버리는데, 얼굴이 벌게지도록 고무줄놀이를 하며 뛰어놀던 시절이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이 나였다니.     

 

땀의 구성성분은 여유와 다정인 것 같다. 날이 더워질수록 불쾌지수가 올라가고 짜증이 는다는 사실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여름엔 자주 예민한 내가 특별히 더 싫어진다. 최대한 그로 인한 피해자를 줄이고자 노력하는데, 그 노력의 하나로 거실 에어컨 바람을 포기하고 방문을 닫는다. 차라리 스스로 만두가 되는 것이 낫다. 만두가 되어 뜨거운 선풍기(아니 열풍기) 바람이나 쐬고(아니 쬐고) 있자니 일상에서 여행이 사라졌다는 사실이 새삼 슬프다가 화가 난다. 여행이 있었다면 방문을 닫고 만두가 되는 대신 방콕 거리에서 로띠를 먹으면서 다음으로 뭘 먹을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을 텐데. 방문 밖으로 나와 모두와 거리를 두고 잠시 나의 에너지를 채워 돌아갈 수 있을 텐데. 현실은 뜨끈한 방바닥 위에 앉아 땀을 한 바가지 흘리며 얼마 없는 여유과 다정을 잃어가는 것뿐이다.      



요 며칠 사이 행안부에서는 폭염 심화에 따라 온열질환 예방을 위해 외출을 자제하라고 문자를 보내는데 오히려 외출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가만히 집에만 있으면 정말 ‘압력밥솥’에 들어가 앉아있는 꼴인데 이미 찜통의 만두가 되기로 결정한 내가 다시 압력 밥솥 안에 들어가야 한다면 무엇이 되는 것일까. 더위는 거짓 없이 문자 그대로 ‘살인적’이고 문밖에는 역병이 창궐하고. 긍정적으로 여름의 낭만을 상상하는 것이 올해는 좀 어렵다. 안타깝지만 앞으로 여름은 추억의 공백기가 될지도 모른다. 작년 여름만 해도 좋은 추억이 단박에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는 작년보다 더 나쁘다. 외로움이 미덕인 여름이다. 확진자 수가 위협적이라 누굴 만날 수 없다. 지인들을 손바닥 안으로 불러들여 카톡을 하고 목소리를 듣기라도 할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거의 매일 이야기하고 통화하는 몇몇 친구들 덕에 내가 땅만 긁는 멍청이 짓을 하지 않고 있다. 고마워 여러분들.      


추억의 공백을 매우기 위해 올해는 나름 노력이란 걸 한다. 페터 비에리가 말했다. “인생과 내면의 삶을 그저 저 혼자 흘러가게 놓아둘 수는 없다. 그리고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그냥 몸을 맡기고 알아서 어떻게 되겠지 해도 곤란할 것이다.” 추억의 공백기에 내 안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변화를 방치하거나 방관하지 않고 해쳐 나가기 위해, 감정에 함몰되지 않기 위해 다양한 것에 관심을 두려고 노력한다. 적극적인 노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여름을 완전히 망쳐버리지 않기 위해 애를 써본다. 덕분에 새로운 관심사를 발견하는 것도 좋고. 그리고 자연스럽게 취향에 대해 생각한다. 얼마 전 한 친구는 “내가 향기로 치유받는다는 사실을 최근에 발견”했다고 했다. 아직도 우리는 우리의 취향에 대해 정확히 모른다. 모르는 게 취향뿐일까.



여름이라 해가 깊이 들어오기도 하고 힘이 세졌는지 가게 화분들이 “나는 지광성이다!”를 외치며 모든 가지가 일제히 해를 향해 몸을 기울인다. 먹성 좋게 해를 탐하는 듯싶지만 창가에 가져다 놓으면 잎이 타거나 노랗게 변하고 시들시들해진다. 해와 일정 거리를 둔 상태에서만 해를 좋아하는 조건부 지광성이다. 어쩌면 내 마음도 더위 때문에 여유와 다정을 잃은 게 아니라 조건부 지광성 같은 상태일지도 모른다. 추억의 공백기를 만드는 이유가 반드시 외부에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와 다정을 잃은 조건부 지광성 상태의 저를 받아주시는 모든 지인 분들 게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여름이 힘든 것도 온전히 날씨 때문만은 아니다. 내년 여름은 또 어떨지. 오늘은 우선 후텁지근한 여름밤 공기를 식혀줄 만한 하프시코드 연주를 찾아 듣다가 자야겠다.    


<이미지 출처: 영화 '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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