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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15. 2021

여백의 향기

최근 읽은 책에 따르면 바나나 냄새는 350개가량의 분자로 이루어져 있고 커피 향은 800개 분자로 구성된다고 한다. 냄새가 그렇게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니. 인터넷에서 본 걸로는 사람들이 느끼는 겨울의 찬 공기 냄새는 사실 냄새 없음의 냄새라고도 한다. 찬 공기는 후각을 둔하게 만들고 냄새 분자를 덜 퍼지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가 감지하는 냄새 분자의 양도 적어진다고 한다. 그래서 차갑고 상쾌하다고 느끼게 된다고 하는데, 쓰신 분은  그걸  여백의 향이라고  표현했다. 이 이야기를 듣자마자 차가운 시골의 새벽 공기가 떠올랐다. 그건 여백의 향이었구나.


부재로써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가끔 꽤나 흥미롭다. 누군가를 설명할 때 그 자신을 뺀 모든 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그 사람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든가. 사람들이 가장 쉽게 드는 예시는 "이 지긋지긋한 회사, 내가 퇴사했을 때 빈자리 느끼고 아쉬워해 봐라!" 하는 상상인데 실제 그런 일이 벌어졌더라는 이야기는 잘 못 들어봤다. 부재가 생각보다 훨씬 잘 채워진다는 것도 흥미롭다. 요즘 엄마가 한약 달이듯 매일 끓여주는 인삼물을 마시고 있어서 비염의 부재를 경험하는 중이다. 부재로써 존재의 불편함을 진하게 느낀다. (민간요법 최고!) 직장인들의 흔한 바람과 달리 회사에서 부재로 존재의 불편함을 드러내는 경우라면 참 씁쓸하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책이란 게 무게가 상당해서 도서관으로 짓는 건물은 설계부터 일반 건물과 다르게 짓는다고 한다. 서점이 지하나 1층에 위치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책을 내 어깨만큼 쌓아뒀던 내방 협탁이 휘어진 이유를 새삼 확인했다. 책이 상당히 많은 경우라면 이삿짐센터에서 견적을 뽑을 때도 영향을 준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이건 가장 실제적으로 와닿는 말이다. 꼭 그래서는 아니고 이사 계획도 없고 이미 2년 전 대대적인 정리를 했지만 일정 수준의 양을 지켜내기 위해 연말 맞이 책 정리를 또 시작했다. 협탁의 부담을 덜어주고, 언젠가 이사를 가게 될 때 견적에 무리를 주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부재로써 존재의 무게를 확인한 것이다.


더위가 가시면 산책을 좀 길게 해 봐야지 다짐했는데, 더위와 추위 사이가 너무 짧았고 그 사이엔 또 내가 정신머리를 챙기기 어려웠던 터라 때를 놓쳐버렸다. 여백의 향을 적당히 즐기면서 소음의 부재 속에서 여유롭게 오래 걷고 싶었는데. 그 좋은 때를 놓쳐버린 게 부쩍 더 아쉬웠던 건 요즘 기 시작한 책 때문이다. 표지도 예쁘고 제목도 예쁜데 글에서 향이 나는 것 같은 책이다. 에마 미첼의 <야생의 위로>란 책인데, 요즘은 또 책 읽을 시간이 거의 없다 보니 내년 봄쯤에나 다 읽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이런 류의 책은 오래 읽을 수 있다면 그게 또 즐거움이 될 것 같다. 도입부터 이미 매력이 흘러넘친다.


나는 오두막집에서 걸어 나온다. 매년 이맘때면 그렇듯 햇살은 부드럽고 투명하다 첫서리가 내려 풀잎은 희고 고운 가루로 뒤덮였고, 날카로운 새벽 공기를 들이쉬면 콧구멍이 살짝 쓰라리면서도 기분이 좋다. 숲 언저리에는 곰팡이 핀 낙엽의 군침 도는 그윽한 냄새가 맴돌고,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제비도 떠나간다. 가을이다.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원을 찾아 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일시적인 흥분을 느끼게 한다. 소위 ‘채집 황홀’이라는 것이다.
나는 화사한 낙엽 카펫 옆을 서성이며 마법 같은 항우울 효과가 나타나길 기다린다. 햇살이 따스하다. 눈부신 빛깔들 속에서 보낸 몇 분이 기분을 돋워주어 저말로 입안에 상큼한 맛이 느껴질 것만 같다.


후각은 훈련을 통해 발달시킬 수 있다고 한다. 그 훈련을 하는 방식은 매일 화학적인 것이 섞이지 않은 몇 가지 냄새를 반복적으로 맡는 것으로도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시골에 가거나 산책을 하다 보면 후각이 살아난다고 느끼는 것일까? 화학적인 것이 부재한 상태에서 또렷하게 살아나는 후각의 존재감. (후각은 영 꽝인 내가 유독 여름 하수구 냄새를 잘 맡는 건, 냄새의 부재와 후각의 존재를 통해 어떻게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 갑자기 궁금해졌다.)


나이 들면서 부재를 통해 존재의 소중함을 느끼는 건 대체로 슬프다. 건강, 체력, 활기, 탄력 이런 단어들. (하, 벌써 코끝 찡) 얼마 전 목과 어깨 통증으로 정형외과에 다녀온 후, 영양제 박사에게 면역력에 좋은 영양제를 추천받았다. 성분과 원산지까지 설명하며 골라준 것들을 바로바로 장바구니에 주워 담았는데, 담고 보니 6-7개가 되었다. 우선 기본만 먹어.라고 했는데, 그것이 벌써 한 보따리라니. 이런 거 먹어도 별 효과를 모르던 젊음은 가고 좋은 거 먹으면 꽤 잘 알아차릴 수 있는 내가 되었다. 인삼물 덕분에 편안한 겨울을 보내고 있는 것처럼.  


여백의 향으로 느끼던 시골의 차가운 공기에는 늘 그리움이란 정서가 배어있다. 자주 맡을 수 없다는 것 또한 부재를 통해 존재를 강조하는 그리운 향의 방식이다. 미세 먼지 때문에 연일 뿌연 하늘을 보며 출근하는 날엔 꼭 숲 냄새를 담은 시린 아침 공기가 간절해진다. 향을 어딘가에 담아 기록할 수 있다면, 그리울 때마다 꺼내서 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풍경도 말도 목소리도 모두 기록하고 보관할 수 있는데 냄새만은 그럴 수가 없으니 참 ‘냄새’ 다운 방식이란 생각이 든다. 기록할 수도 없는데 기억에 가장 오래 남는 감각이 냄새라는 것도 참 오묘하다.


부재의 아쉬움을 채우기 위해 올 겨울엔 틈틈이 야생의 위로를 읽으며 그리운 향을 맡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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