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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Sep 16. 2021

동경 2


고등학교 때 휴학생을 만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 애는 디스크가 심해서 휴학 비슷한걸 몇 개월 간 지속하는 중이었다. 같은 학교 학생이지만 학교에선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고 교회에서 처음 만난 그 애를 소개해준 건 그 애의 보디가드처럼 보이는 남자애였다.  2인 3각 달리기 파트너인 것처럼 둘은 늘 함께였고 여자애가 조금이라도 아픈 기색이 보이면 외투를 벗어 여자애가 누울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며 살뜰히 보살폈다. 순정만화 설정이라고 해도 과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과연 여자애는 마르고 하얀 피부에 씩씩한 성격을 갖추고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이과 수학 천재라고 했다. 설정이 확실히 과하다. 한 가지 이상했던 건 누가 봐도 남자애가 여자애를 좋아하는 게 분명했는데 둘이 절대 연애를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걸 어장 관리라고 하는 걸 아직 모를 때였다.


설희는 하얗고 검은 아이였다. 우윳빛 피부는 모공도 안 보일만큼 고왔다. 우리는 모두 설희의 통통한 볼을 만지작 거리기를 좋아했다. 10대 청소년이면 피할 수 없는 여드름 한 번 나지 않은 뽀얀 피부에 검은 생머리가 설희의 상징이었다. 자연스럽게 잔머리가 흘러나온 묶음 머리를 하고 있으면 성장소설 속 주인공의 첫사랑이 눈앞에 그려졌다. 고1 수학여행 때 롯데월드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이 있는데 눈이 예쁘게 휘도록 웃고 있는 설희는 정말 하얗고 까맣다.      



벌이를 시작하니 동경은 다른 쪽에서 생겼다. 한 번은 번역가에게 항의 전화를 받았다. 파인컷을 마치고 최종 검수를 하기 위해 번역가를 불렀는데, 1차 프리뷰 번역을 했던 분이 후배가 자신의 번역을 체크한다는 건 이쪽 바닥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항의를 한 것이다. 그쪽 바닥의 생리가 뭔지 저는 몰라요. 당신 실력을 시험해보겠다는 게 아니라 방송 전에 꼼꼼하게 확인하는 것뿐이에요.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막무가내였다. 그렇다고 1차 번역가에게 또 검수를 맡기는 건 의미 없는 일인데, 그럼 지금 당장 와서 2차 검수해 줄 사람을 소개해주겠냐고 했더니 그건 어렵단다. 그럼 나는 다른 수가 없고 이런 항의 전화로 시간을 뺏길 틈조차 없는데.


입씨름에 취약하고 설득에도 취약했던 나는 끙끙거리며 전화를 붙잡고 있었다. 그때 그 아이템 담당 선배가 “무슨 일이니? 전화 이리 줘봐.” 하고 5분 정도 통화를 하고 상황을 마무리 지었다. 점심 먹으러 가는 길에 다른 언니들은 “ㅇㅇ이가 원래 이런 거 잘해.” 하고 말해주었다. ㅇㅇ선배는 “이 걸로 밥 벌어먹은 지가 얼만데, 너도 나중엔 다 이렇게 돼.”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밥벌이를 오래 해도 선배만큼은 되지 못했다.


그런 류의 동경은 어떤 분야에서 일을 지속하도록 만드는 중요한 동력이 되거나 척력이 되었다. 어떤 선배는 그래도 작가로 시작했으면 방송대상은 한 번 타고 그만둬야 한다고 했다. 나는 애초에 그런 욕심이 없었다. “둥둥이는 FM으로 구성하잖아요.”라는 말을 듣는 수준일 뿐인 내가 무슨. 하지만 그때 나는 겨우 입봉 1년 차였는데 FM구성 아닌 뭘 더 할 수 있었을까. 한동안 동경이 되었던 선배들의 모습을 다 소진한 후, 나는 달의 반대편을 본 사람처럼 그곳에서 생긴 척력으로 이직을 했다.     



이직을 하고 난 후에도 동경할 수 있는 ‘그 무엇’을 탐색했다. NGO에서 일하는 누군가를 상상할 때 만들어내는 스테레오 타입 말고 실제적인 동경. 그런 동경은 현장에서 쉽게 발견했다. 사업장에서 주민들과 끈끈하게 연결된 직원들을 보는 것, 그들 간의 신뢰와 애정을 확인하면 저절로 동력이 생겼다. 하얗고 여린 손이나 야리야리한 몸처럼 완전히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결국은 동경이었다.      


남수단의 더위는 50도까지 치솟아 식욕마저 빼앗았고 평소엔 거의 마시지를 않는 콜라를 아침 댓바람부터 대여섯 병씩 마셨다. 코카콜라의 은총만이 더위를 이기게 해 주었다. 이런 더위 속에서 에어컨은커녕 손부채만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며 일상을 꾸리는 사람들이 대단해 보였다. 마을을 오가며 주민들을 만나기 위해 수풀과 덤불이 뒤덮인 길과 흙먼지 길을 종일 걸어야 했다. 해가 뜨기도 전에 티셔츠는 이미 땀에 흠뻑 젖었고 아무리 걸어도 해를 피할 그늘은 없었다. 마을에 머무는 동안에도 온통 더위였다. 콜라를 입에 물고 헥헥거리며 걷는 동안 나를 지치지 않게 해 준 것은 유머였다. 내가 가장 부러워 하는 그것. 언제든 그렇겠지만 특히 이런 환경에서 유머는 대단한 능력이다.



하루는 긴급구호 팀장님과 함께 일정을 소화하게 되었다. 운전석 옆에 앉아 창밖을 보던 팀장님께서 멀리 손짓하며 누군가를 불렀다. “Hey, brother!” 목청이 보통 좋은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이 돌아봤고 꾸준히 그의 손짓이 향하는 곳에서 한 남자가 수줍게 걸어왔다. 차에서 내린 팀장님은 남자와 어깨 인사를 나눈 후 물었다. “Am I your friend or not!” 남자는 수줍게 또 웃기만 하자 다시 한번 큰 목소리로 물었다. “Am I your friend or not!” 남자는 뭘 그런 걸 물어하는 듯 씰룩씰룩 웃더니 “Your friend.”하고 답했다. 몇 마디 인사를 나누고 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팀장님, 아는 사람이에요?
어제 잠깐 마주쳤어요.     


장악력이란 게 이런 거구나. 그건 내가 동경해도 결코 가질 수는 없는 종류의 능력이었다. 동경은 가까이 갈수록 멀어지는 신기루 같았다. 아무리 가지고 싶어도 결코 닿을 수는 없었다. 닿을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일으키는 운동에너지 사이에서 나는 오랫동안 밥벌이를 했다. 나를 성장시키는 추동력의 일정 부분은 열등감에서 온 것이 분명하다. 지성과 이성, 감성 전방위에 걸쳐 모자라는 나를 부끄러워하는 열등감과 갖고 싶어 하는 동경 사이를 진자 운동하며 조금 더 멀리까지 뻗어갔다가 더 깊이 멀어지곤 했다. 지금도 매일 열등감과 동경이 주렁주렁 열리는 나무를 키우면서 쑥스럽게 살고 있다. 그 사이에 자뻑의 열매도 종종 열리면 좋겠는데, 오늘도 열등감과 동경을 주워모으려는 듯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다가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그냥 해야 할 일을 하자. 할 수 있는 일을 하다보면 무슨 수가 나겠지. 그러니까 오늘도 성실해야 하는데. 성실해야 하는데...

 

<이미지 출처: 영화 'out of afri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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