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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15. 2022

엄마는 탕수육이 좋다고 하셨어

별 감흥이랄 건 없었지만 2년을 버틴 것을 자축하는 이벤트가 있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조금 늦은 회식을 3월 초에 하려고 했는데 격리생활을 하느라 부득이 회식이 밀렸다. 별 감흥이 없었지만 날짜마저 멀어지니 더욱 취지가 흐려져서 그냥 맛있는 거 먹는 날이 되어버렸다. 차이나타운의 100년 맛집을 회식 장소로 정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인 대불호텔에서 시작된 중식당이라고 한다. 지난겨울 대불호텔 전시관을 둘러본 후로 내 머릿속 대불호텔은 개화기 힙 쟁이들의 성지, 사교의 장 같은 느낌이라 그 시절부터 힙 쟁이들의 미각을 사로잡았던 그 맛이 아직까지 사랑받고 있다는 게 존경스러웠다. 특히 자영업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100년은 상상도 안 된다.


외관은 세련미와 거리가 멀었지만 맛은 과연 100년을 거뜬히 이어올 만한 맛이었다. 무엇보다 튀김을 잘한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역시 중식에서 튀김은 무척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다. 코로나 후유증으로 후각을 완전히 상실한 상태라 (언제 돌아올까) 오로지 식감과 미각에 의존해서 음식을 먹고 있다. 그래서 먹는 즐거움이 조금 줄었지만 먹는 양은 전혀 줄지 않았다. 암튼 냄새가 없이 식감으로만 판단해도 훌륭한 음식이었다. 엄마는 늘 찹쌀 탕수육, 꿔바로우보다 오리지널을 선택하는데 오늘의 오리지널 탕수육은 그간 우리 가족의 원픽이었던 '신'의 탕수육을 근소한 차이로 밀어냈다. 바삭하고 쫀득한 튀김 안쪽에 두툼한 고기까지 씹는 재미와 만족감이 함께 있었다.


유니 짜장과 라조기도 훌륭했고 무엇보다 군만두는 기대 이상이었다. 부추와 고기로 속을 채웠는데 역시 튀김 장인답게 만두도 보통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한입 딱 물었더니 육즙이 적절히 베어 나와서 서비스로 먹는 군만두와 레벨이 다르다는 걸 증명하는 맛이 느껴졌다. 군만두를 즐기지 않는 편인데도 두 개나 먹었다. 엄마와 동생은 군만두를 연신 칭찬하며 결국 2개나 따로 포장했다.


매장 안 테이블이 꽉 차있었고 점심시간이라 나잇대가 꽤 있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소란스럽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 가족이 어떤 메뉴를 몇 개 시키는지부터 군만두 2개를 추가로 포장했다는 사실을 모두에게 공유당했다. 하필 직원분이 우리 자리로 오지 않고 카운터에서 큰 소리로 "군만두 2개 포장해 드려요?"라고 확인하시는 바람에.

항구 근처라 더 춥기 때문에 비가 오는 스산한 날씨에 차이나 타운을 걷는 건 썩 추천하지 않지만 오늘의 중식당은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와서 먹어야 할 만큼 궁금한 메뉴가 많았다. 마파 부두 밥도 먹어야겠고 사천 짬뽕도 먹어야겠고 탕수육은 다시 먹어야 한다. 가격도 합리적이라 만족스러웠는데 나오는 길에 입구를 보니 신동엽 님이 오래전 다녀간 곳이었다. 우리 가족이 좋아하는 중식당엔 꼭 신동엽 님 사인과 사진이 붙어있다. 맛집의 기준으로 삼아도 될 것 같다.


뿌듯한 식사를 마치고 군만두 두 개를 손에 들고 우산을 쓰고 카페로 가는 길은 한적했다. 비 오는 월요일 차이나타운에는 사람이 없었다. 우연히 만난 무인 스티커 사진(이 아니라 뭐라고 부르는 말이 있을 텐데.) 샵에도 사람이 없어서 덕분에 편하게 사진도 찍었다. 대학생 때 찍어본 게 마지막인 스티커 사진. 뒤져보면 내 앨범 속에 고등학교 때 찍은 요만한 스티커 사진이 있을 텐데. 오랜만에 새로운 스티커 사진이 업데이트되었다.


기념일에 식사를 한다는 건 핑계일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 이벤트를 즐겨야 할지 딱히 모르겠으니까 그냥 맛있는 걸 먹는 거지. 하필 얼마 없던 후각마저도 다 잃어서 맛을 제대로 즐겼는지 모르겠지만. 맛있는 식사를 먹을 구실을 삼았다는 것 외에 2주년이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23개월 차나 24개월이 되는 바로 그날이나 오늘이나 다를 게 없다. 다만 2년 전과 달리 새로운 방향성에 대해 새로운 불안과 고민이 생겼다는 것뿐. 겁쟁이에게 이런 일들은 부담스러운 과제인데 그 불안과 숙제를 일상처럼 끌고 가야 하는 게 자영업이지.  100년 맛집에 다녀온 2년 차 자영업자여, 내일도 그저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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