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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Feb 10. 2022

아끼다 똥 된다.


엄마가 폴란드 여행에서 가장 좋아했던 순간들을 꼽자면 그중엔 폴란드 그릇을 사던 순간이 있다. 그 무거운 걸 해외배송비 아끼자고 낑낑거리며 두 딸내미가 들고 왔다는 건 다 잊었겠지? 그릇이 예쁘긴 했다. 한국에서 흔히 보는 공산품이 아닌 장인 수공예품 인증을 받은 그릇이었는데, 그림도 예쁘고 정교해서 제법 비싸지만 지금 여기 아니면 절대 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골목마다 예쁜 그릇이 많아서 고르는 것도 힘들었지만 엄마의 눈은 빛났고 가게의 모든 그릇을 훑어볼 수도 있을 것 같았 다. 실제로 아주 많은 양의 그릇을 모양과 크기별로 구경하고 고민하긴 했다. 드디어 심사숙고 끝에 고른 그릇들 중 가장 크고 넓은 접시를 잡으며 엄마가 말했다. 


여기에 묵무침 담아 먹으면 예쁘겠다.


고운 꽃이 그려진 우아한 폴란드 수제 도자 접시 위에 무엇을 담을 것인가. 엄마가 떠올린 것은 묵무침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해 겨울 우리 가족이 가장 즐겨 먹었던 음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예상대로 한국에 와서 그 접시는 꽁꽁 묶여 서랍장 안에 들어간 뒤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 예쁜 걸 보려면 매일 사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엄마는 그 소중한 걸 쓰다 깨지면 어쩌냐는 입장으로 서랍장에 고이 싸서 넣었다.


그렇게 보지도 쓰지도 못하다가 이삿날 깨 먹거나 영문도 모르게 사라지는 (우리 집은 살아있고 물건을 잘 먹는다.) 일은 충분히 겪었다. 최근에도 엄마에게 아끼지 말고 차라리 쓰다 깨 먹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말을 했는데 그게 내 물건이 될 줄은 몰랐다. 지난달에 예쁜 곰돌이 유리컵을 생일 선물로 받았다. 투명 컵 안쪽이 곰돌이 얼굴 모양으로 한 겹 더 있어서 우유나 커피를 담으면 곰돌이 모양이 선명해지는 귀여운 컵이었다. 선물해준 친구도 내가 얼마나 물건을 잘 깨는지(최근 한 달 사이에도 컵을 무척이나 깨 먹어서 12개를 새로 주문했다.) 알고 있어서 깨뜨릴 것에 대비해 2개를 보내주었다. 엄마가 이렇게 예쁜데 어떻게 쓰냐고 했을 때, 아끼다 똥 되니까 그냥 잘 쓰다가 깨 먹자고 했는데, 그게 첫날이 될 거라고는 예상 못 했다. 


네가 쓰자며.라는 말에 내가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지. 엄마라고 깨 먹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내가. 곰돌이 컵은 아깝지만 여전히 아끼다 똥 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귀한 것일수록 더 열심히 써보자고 생각한다. 교회에서도 사람에게는 하나님께 받은 은사나 달란트가 있는데 그걸 가지고도 쓰지 않으면 점점 사라진다고 한다. 내가 가진 소중한 것일수록 열심히 써야 한다. 그래도 엄마, 왜 첫날 깼어. 흑흑. 우리 집엔 내 곰돌이 컵 말고도 똥이 되어가고 있는 물건이 145가지는 되는데.


나에게도 똥이 되어가는 물건들이 있다. 오랜만에 결혼식에 갈 일이 있어 오늘 코트를 꺼내다가 똥이 되어가고 있는 겨울옷들을 발견했다. 출근할 땐 롱 패딩으로 몸을 둘둘 감고 다니는 게 따숩고 편하니까 롱 패딩 2개 빼고는 모두 꺼내지도 않았다. 본의 아니게 아끼게 된 겨울 옷들. 결혼식이 아니었으면 이 코트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빛 한 번 못 볼 뻔했지. 정장 바지도 몇 년 만에 꺼내 입었는데, 세상에 내가 언제 이렇게나 대단하게 살이 쪘담. 자칫하다가는 또 원치 않게 정장 바지를 아껴주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것 참 슬픈 일이네. 


내 인생엔 충동구매란 것이 거의 없었다. 두 번, 세 번, 네 번 생각하고 살 때 또 한 번 생각의 재판장 앞에서 구매의 정당성을 설명한 후에야 물건을 손에 쥐었다.(빵은 예외) 그런데, 작년부터는 돈도 아끼면 똥 된다는 생각이 든다. 티끌 아낀다고 미래의 내가 부자가 되지도 않을 것이 거의 확실시되고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그 티끌이라도 있어야 덜 초라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당분간은 옛날처럼 엄격한 소비 제한은 없을 예정이다. 빵을 만수르처럼 사 먹던 과거의 나를 기억하면서 돈 쓰는 일을 실천해볼 생각이다. 쓸데없지만 갖고 싶은 것도 더 편하게 사고, 쓸데 있는 건 더 좋은 걸 사볼 생각이다. 아껴서 뭐  해.


얼마 전에 동생이 언니는 늘 뭘 부지런히 모았다는 말을 했다. 내가? 하고 가만히 생각해보니 맞는 말인 것 같다. 중학교 때부터 기억나는 몇몇 품목들이 있다. 일시적인 중독이었던 것 같다. 어떤 감정 상태나 상황에서 구멍이 느껴질 때 일시적 중독으로 하나의 물건을 사 모은 것 같다. 소비 고삐를 풀었지만 중독 상태에 이르지 않도록 긴장을 함부로 풀지는 않아야겠다. 소비중독의 결말은 뻔하다. 최근엔 고삐를 푼 초보자답게 온라인 구매에서 헛발질을 몇 번 했고 벌써 안 쓰는 화장품과 크림일 몇 개 쌓여버렸다. 하지만 사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내가 고삐를 풀어봤자지 뭐. 진짜 고삐는 풀지도 못할 것이 뻔하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당분간 잘 쓰면서 지내보자는 거다. 아끼다 똥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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