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턱대고 찾아오는 직감이 아니라 그동안 경험을 바탕으로 느끼는 강렬한 예감, 촉이다. 나의 촉은 특히 위험을 감지하는 쪽으로 발동하곤 한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이 위험하게 느껴질 때. 이를테면 끌려가고 싶지 않은 술자리에서 나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촉. 오래전 나를 참 미워하던 선배가 초저녁부터 술을 퍼마시고 있는 자리에 끌려가서 호되게 당했던 날이 있다. 굳이 야근하는 나를 불러낸 이유란 게 뻔하다. 위험을 감지하는 촉이 발동했지만 선택권이 없어서 '질질' 끌려가 가만히 앉아서 뚜드려 맞았다. 그런 자리의 끝은 꼭 진부하게 "다 너 위해서 하는 말이야.'로 끝나지. 뚜드려 맞은 후 다시 쌓아놓은 일을 하러 사무실로 돌아오면서 “위하긴 뭘 위해.”하고 욕을 했다.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그 누구도 말을 않는 도시에서” 살려면 촉이 중요하다. 촉을 신뢰한다고 하면 이성이 부족해 보일 수 있지만 촉이 좋은 사람에겐 묘한 신뢰가 생긴다는 건 모순이다. 촉에 대해서는 표현이 중요한 편인 것 같다.
촉에 의지하게 될 때는 불확실성이 높을 때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는 기댈 수 있는 모든 걸 잡고 싶게 그렇게 해서라도 안정감을 찾고 싶어 지기 때문이다. 부정성 편향(존 티어니, 로이 F. 바우마이스터, 2020)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타르 한 숟가락은 꿀 한 통을 망칠 수 있지만, 타르 한 통에 들어간 꿀 한 숟가락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니까 지금 꿀통에 넣으려는 숟가락에 타르가 있는지 아닌지 모를 때는 기댈 수 있는 모든 것에 기대어 판단하고 싶어 진다. 그걸 가려내는 시간이 길어지면 영혼이 삭는다.
최소한의 선의(문유석, 2021)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불확실성은 패배 이상의 고통이다. 인생을 좀먹는다. “ 전적으로 동의한다. 불확실성이 높으면 고민이 길어지는데 그렇다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라는 법은 없다. 장고 끝에 악수 두는 경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행복을 알차게 누리며 살 수 없다면 최대한 불안을 제거하며 살고 싶다. 그래서 촉이 좋은 사람이면 좋겠는데, 그냥 평범한 사람인 것 같다. 촉이 좋지 못한데 불안을 제거하고 싶은 사람은 자칫 겁쟁이로 평생 돌다리기 부서질 때까지 두드리며 살 가능성이 높다. 칼 세이건은 패서디나 강연 중 이런 말을 했다. (정재승, 열 두 발자국에서 인용)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는 절묘한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 앞에 놓은 모든 가설을 지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동시에 새로운 생각에도 마음을 활짝 열어야 합니다. 만일 당신이 모든 생각에 가볍게 휘둘린다면 그래서 회의적인 시선을 갖지 못한다면 당신은 가치 있는 것과 가치 없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게 됩니다. 하지만 당신이 의심만 한다면 그 어떤 새로운 생각도 보듬지 못하게 됩니다.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채 비상식이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괴팍한 노인네가 될 것입니다. 모든 생각이 똑같이 옳다면 여러분은 길을 잃고 말 것입니다. 결국 그 어떤 생각도 옳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
-회의주의자가 짊어진 부담- 칼 세이건, 패서디나 강연 중에서 1987-
촉의 다른 말은 분별력이라고 해도 될까. 분별력이든 촉이든 가지고 싶다면 이해의 폭이 넓어져야 하겠다. 이해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잘 가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미 알고 있었던 것들에 대해서도 의심이 생기니 알아도 아는 게 아니고 모르는 것만 자꾸 늘어난다.
세상을 해석하기란 한결같이 어렵다. 정말로 “이 세상 어디가 숲인지 어디가 늪인지” 모르겠다. 그걸 “그 누구도 말을 않는" 이유는 서로가 확신하지 못하고 제대로 모르기 때문일지 모르겠다. 무언가 하나라도 흔들림 없이 확신을 주는 것이 있으면 불안 때문에 흔들리는 촉을 잠잠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그 하나가 없어서 촉을 바짝 세우게 된다. 세워봤자 똥촉 어디 가겠냐마는. 흔들리는 꽃들속에서는 네 샴푸향이 느껴진다는데 흔들리는 분별력 속에는 혼돈의 향기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