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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29. 2022

흥겨운 사람들

퇴사한 후에도 친구로 남은 사람 중 E는 나와 가장 짧은 시간 함께 근무했다. 내가 퇴사를 한 달 앞두고 슬슬 정리를 시작했을 무렵 입사한 신입사원 E와는 휴가 기간을 제외하고 2주 남짓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근무했다. 엄혹한 시절에 입사한 것이 안 된 마음에 성심성의껏 인수인계를 해 주고 나왔는데 그 후로 우리는 제법 신기하게 더 친해졌다. 종로에서 여의도에서 송도에서 떡볶이와 케이크를 먹었다. E는 내 친구들 중 가장 어린데 이제 곧 20대를 벗어난다. 나의 마지막 20대 친구가 30대로 입성한다.      


성대모사를 잘하는 J와 조근조근한 말투로 며칠이 지나도 생각나서 웃게 만드는 유머를 일삼는 E와 자주 어울려 놀았다. 셋이 만나는 날은 헤어질 때 활명수를 한 병 마시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오늘만큼은 제발 적당히.라고 생각한들 소용없었다. 차라리 미리 소화제를 사두는 게 나았다.   

  

하루는 셋이 닭갈비를 먹다가 J가 언니쓰의 Shut up을 성대모사로 완창 할 수 있다고 했다. 특히 제시 파트에서 홍진경 파트로 넘어가는 부분을 기가 막히게 따라 할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거침없이 하이킥의 나문희 여사와 오케이 혜미의 호박고구마 티키타카 성대모사를 혼자 해내는 여성이다. 회사에서도 종종 직원들의 성대모사를 가져와 우리를 웃겨주곤 했다. 그녀의 성대모사 실력은 이미 알고 있으니 언니쓰 노래를 성대모사로 완창 할 수 있다는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건 알만 했다. 그러나 설명만으로는 성이 안 찼는지 그녀는 닭갈비를 먹으면서도 아쉬워했다. 그리고 어느새 식사 후 우리는 코인 노래방에 앉아있었다. 노래방에 가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이더라. 2006년쯤이었던 거 같은데,      

들어가자마자 E는 언니쓰의 Shut up을 성대모사로 완창 했다. 역시 상상 이상의 무대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E가 “그럼 저도 한 곡.” 이라며 뉴이스트의 어떤 곡을 격렬한 댄스와 함께 완창 했다. 이 모습은 과거의 한 장면을 끌어온다.      


거의 십 년 전 안면도 MT였다. 숙소 담당 PD가 바닷가 마을에서 굳이 산속 한가운데 숙소를 잡았고 저녁에 다들 한 마디씩 하며 고기를 구웠다. 배도 채우고 술도 채운 와중에 모두들 흥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때 막내 FD가 테이블 한쪽 자리로 나서 무반주로 소녀시대 GEE를 부르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몸이 근질거렸던 걸까. 어떻게 아무도 권하지 않았는데 무반주 댄스가 가능한 지 문화 충격에 폭소가 터졌다. 우리 귀염둥이 FD는 앙증맞은 춤을 몇 소절 추다 멈추고     


"아, 아니야. 이렇게 대충 하는 거 아닌데. 처음부터 다시 할게요."     


이번에도 핀잔을 준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자기 검열을 통해 퍼포먼스를 중단한 것이다. 그리고 몸을 몇 번 탈탈 털더니 무반주 GEE를 2절까지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녀는 춤을 참 잘 추는 사람이었는데 회식 후 노래방에 가면 그녀와 내 친구 조연출의 독무대 순서가 반드시 있었다. 조연출은 한때 SM 연습생 출신으로 신화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했던 무대 경력자였다. 짗굳은 PD들이 신화 노래를 끊지도 않고 서너 곡 줄줄이 틀면 헉헉거리면서 춤을 추다가 바닥에 쓰러지곤 했다. 그런 에너지와 흥을 구경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당사자가 된다는 건 식은땀 나는 일이다. 어후. 나는 흥의 구경꾼이 좋다.      


오래전 Greenday의 스탠딩 콘서트에 다녀온 적이 있다. 유독 고생스러웠던 방송에 대한 위로로 담당 PD가 선배와 함께 갈 수 있는 티켓을 주었는데, 록밴드의 스탠딩 콘서트가 얼마나 무서운지 공연 시작 전부터 충분히 느꼈다. 내 몸을 내가 통제할 수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휘둘릴 뿐이었다. "엄마, 나 무서워."가 저절로 나오는 분위기였는데 ‘이런 사람들이 이 에너지를 숨기고 아무렇지 않은 척 우리 사이에 섞여 살고 있단 말이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Greenday의 음악은 좋았지만 공연 중 무대에 오른 관객의 광기는 나를 또 한 번 놀라게 했다. 그동안 발라더들의 공연만 다녀본 나는 하얗게 질려버렸다. ‘엄마, 여기 정말 무서워.’ 그날 그 관객들은 지금도 일반인인척 살고 있겠지?


그나마 그땐 어렸지만 이제 시간이 많이 지나서 요즘 나는 에너지가 더 시들해졌다. 친구들도 그렇다. 다들 넘치던 흥이 조금씩 잔잔해진 것 같다. 혹시 여유가 생기면 잃었던 흥을 회복할지도 모르지만.

      

어릴 때 퐁퐁(우리 동네에선 퐁퐁이라고 불렀던 트램펄린)을 타면 내가 살짝만 뛰어도 같은 판에 올라선 친구가 세게 뛰면 내 몸도 저절로 높이 튀어올랐다. 어느 날은 내가 팡팡 뛰기도 하고 어느 날은 친구들이 세게 뛰는 힘에 밀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높이 떠올랐다. 흥이란 게 그런 거 같다. 내가 가진 것과 상관없이 무리 지어 있다 보면 저절로 흥이 끌려간다. 무섭기도 하고 신이 나기도 하고. (코인 노래방 성대모사와 춤은 즐거웠지만 Greenday 공연은 무서웠어. 정말이야.) 어느 날은 흥이 많은 친구들 덕에 기운이 오르고 어느 날은 만남 자체가 버겁다. 감정 전이가 빠른 편이라 그들의 무드에 동화되는 게 무의식 중에 상당히 힘을 쏟아내는 일인 듯하다.      


나 같은 사람에겐 일 년에 폭발하는 흥을 감당할 수 있는 횟수가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올해는 몇 번 쓴 거 같으니까. 당분간 잔잔히 지내야지. 분배를 해야 지치지 않고 뜨악하지 않고 즐길 수 있다.  요즘은 혼자 익숙한 자리에 가구처럼 앉아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게 그렇게 좋다. 아니다. 요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원래 그렇다. 나는 늘 혼자 낭비하듯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지.      


그런데 코인 노래방은 다시 생각해도 참 즐거웠어. E&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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