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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ug 14. 2022

루틴 바로잡기


가끔 누군가 내 일상을 조금만 지켜보면 나는 참 파악하기 쉬운 사람일 거란 생각을 한다. 모닝 루틴, 출근 루틴, 업무 루틴. 쉬는 날의 루틴. 반복하는 일들이 나를 뻔한 사람, 읽기 쉬운 사람으로 만드는 것 같다. 쉽게 읽히는 사람이란 건 얕은 사람인 것만 같아서 가끔은 의식적으로 루틴을 흔들었다. (아무도 나에게 읽기 쉬운 사람이라고 한 적도 없는데, 이렇게 북 치고 장구 친다.) 익숙한 출퇴근 길 대신 다른 길로 걸어보고, 늘 내리던 역이 아닌 역에서 내리기도 하고, 평소에 하지 않던 방식으로 행동해 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방 정리하듯 가끔씩 루틴을 정리하고 싶었다. 뻔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으니까.      


루틴이 싫은 또 다른 이유는 질문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행동뿐 아니라 사고와 판단에 익숙한 패턴이 생기면,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늘어나서 질문을 잃게 될까 봐 겁이 났다. 매일 하는 일이니까. 늘 생각하던 방식이니까 그러려니 하고 자연스러워지다가 생각하지도 않고 무심히 지나버리는 게 싫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람의 뇌는 게으름에 쉽게 익숙해지는데 패턴에 익숙해지면 사고하는 것 마저 귀찮아져서 질문을 잃고 나쁜지 좋은지, 혹은 옳고 그른지 확인도 하지 않고 게으르게 판단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NGO에서 일할 때 긴급상황 대응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 몇몇 파트너 국가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안전교육을 수료해야 했고 곧 방문해야 할 남수단이 그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일정을 맞추다 보니 2주간의 앙골라 출장을 마치고 거의 일주일 만에 다시 비행기를 타게 된 상황이라 체력이 충분하지 않았고 정신상태도 그리 매끈하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기 전부터 힘들기로 유명한 훈련이니 마음의 준비 단단히 하라는 말을 들었지만 ‘아, 힘들구나,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외에 딱히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일주일간의 훈련은 과연 소문대로였다. 우리는 고립된 상황에서 추위를 이겨내는 법, 야생에서 물을 얻는 법, 도시가 봉쇄되었을 때 단계별 대응 매뉴얼, 테러 대응 훈련, 납치 대응 훈련, 강도를 만났을 때 대처 방법 등을 실제 상황처럼 배웠다. 각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은 전문 배우들이 섭외돼서 실감 나게 진행됐다. 총격 현장에서는 바닥에 어떻게 엎드려야 하는지, 총소리가 나는 방향에 따라 몸을 던지는 방향이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납치 협박을 당할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내가 평생 닥쳐볼 일 없기를 바라는 일에 대한 대응 훈련이 대부분이었다.      


첫날부터 양 손바닥 무릎이 다 까졌고 준비한 밴드는 이틀 만에 다 써버렸다. 고생스러운 훈련을 무사히 마쳤고 다행스럽게도 근무하는 동안 그 훈련에서 배운 걸 써먹을 만한 상황은 겪지 않았다. 훈련의 유효기간이 5년이었고 10년이 지난 지금은 많은 걸 까먹어버렸는데, 한 가지 또렷하게 기억나는 것이 있다. 난민촌 구호 활동에서 벌어지는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훈련을 받을 때였다.      


설정 상황 속에서 구호 물품을 들고 난민촌에 들어가자 다양한 사람들이 우리에게 동시에 덤벼들었다. 술에 취해서 난동을 부리는 사람, 악의는 없지만 정신 착란 증세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사람, 구호 물품이 마음에 안 든다고 화를 내는 사람, 내가 먼저 받겠다고 서로 싸우는 무리들. 직원 차에 들어가서 사고를 일으킨 후에 직원을 협박하는 사람. 일주일 간의 가상훈련 중 가장 실제와 가깝다고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납치, 강도, 폭탄은 당해본 적 없지만 난민촌에는 여러 번 다녀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당황했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단순 훈련이 아니라 당장 눈앞에서 벌어지는 실제 상황처럼 느껴졌다.      


이전과 같은 방식으로 훈련생들이 돌발 상황에 나름의 방식으로 대처했고, 다음으로 교관이 우리의 문제점을 짚어주고, 적절한 대응 방식을 알려주었고, 다시 같은 상황을 재연하며 적용하는 훈련이 이어졌는데 그때 교관이 던진 질문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은 다 착한 사람들인가요? 착하지 않은 사람들은 도와주면 안 될까요?”     


몰랐던 게 아닌데, 분명 알고 있었는데도 그 질문이 굳어진 머리 한쪽을 툭 때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한 장면이 꼬리를 물고 떠올랐다. 구성작가 시절 한 술자리에서 거리의 노점상들이 쫓겨나는 뉴스가 화제에 올랐던 적이 있다. 나와 선배 작가는 당연히 노점 상인들의 편에서 한참을 얘기했는데 그때 쉘리 님이 질문을 던졌다. “약자는 다 옳으니?” 약자라고 무조건 편들기 전에 그들이 정말로 옳은 지를 생각해 보는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 질문을 들었을 때도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면서 너무 쉽게 판단하고 말하는 내가 부끄러웠다.


같은 맥락의 두 가지 질문이 연결되면서, 내가 나쁜 사고 루틴에 빠져 질문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답이 뻔하다고 착각해서 질문하지 않는 태도가 습관이 되면 나쁜 사고 루틴을 만든다는  생각을 그때 했던 것 같다. 답이 뻔해 보여도 다시 질문해 보고 판단해 봐야 하는데, 그런 질문을 잃어버릴까 봐 루틴을 조심하자고 생각는데, 어느새 또 질문을 잃어버린 것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때로는 함정이다. 행동하던 대로, 생각하던 대로 반복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지 다시 되새겼다. 역시 루틴은 위험해.     


그런데 베이킹을 시작하면서 루틴의 새로운 의미를 보았다. 모든 게 처음인 ‘베이킹’ 세계에 들어서니 모든 정보가 새로웠고 그걸 적용하다 보면 당연히 시행착오도 많았다. 처음 할 때는 10개가 낯설고 5번 실수하다가 몇 번 반복하면 6개가 낯설고 2번 실수하게 된다. 그렇게 익숙해지면 그때부터 나에게 가장 잘 맞는 작업 루틴을 만들기 시작한다. 루틴이 뻔하고 나쁘다고 생각했지만 내 생각이 나빴다. 루틴을 완성하기 위해 들인 노력과 루틴의 의미를 간과했던 것이다. 질문을 잃어버릴까 봐 루틴을 피하고 싶었지만 충분한 질문을 거친 후에야 나와 가장 잘 맞는 루틴을 완성할 수 있다는 걸 무시했던 것이다.      


그렇게 시행착오와 질문을 통해 루틴을 완성하면 작업이 수월해진다. 믹싱 볼을 두는 순서, 핸드믹서를 손에 쥐는 방식, 원하는 크림의 상태를 만드는 나만의 믹싱 강도. 작업하기 편한 볼의 기울기 등 완성된 나만의 루틴을 확인하면 그 안에 애쓴 시간이 보이는 것 같아 이제는 가끔 뿌듯하기도 하다. 루틴의 다른 이름은 노력 혹은 노하우인 것 같다. 그 사랑스러운 노하우가 낡고 굳어지지 않게 가끔 내 루틴에 질문하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늘 같은 온도에 반죽을 굽다가 가끔은 ‘혹시 다른 온도에 구우면 더 먹음직스러운 모양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질문을 한다. 180℃에 굽던 쿠키를 150℃에 구우면서 굽는 시간을 바꿔본다. 새롭게 바꾼 온도가 마음에 들어서 왜 진작 150℃로 굽지 않았는지 아쉬웠다. ‘강속으로 휘핑하던 반죽을 저속으로 휘핑해 보면 어떨까?’ 질문하고 시도해 본다. 새로운 방식이 맘에 든다면 루틴을 수정할 때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그동안의 루틴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다 보면 그때는 맞았지만 지금은 아닐 수도 있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니까. 루틴은 잘못이 없다. 루틴을 돌보지 않는 것이 잘못일 뿐. 나를 뻔한 사람이 아니라 노하우가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줄 사랑스러운 루틴을 만들기 위해서, 잘못 없는 루틴을 나쁘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 질문을 잊지 말자. 당연한 것에도 가끔은 질문을 해보는 것.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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