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량만 해주는 사람이 따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베테랑 선생님도 내 마음과 같은 말을 해서 속으로 박수를 쳤다. 내가 초보라서가 아니라 전문가에게도 계량은 큰 일이구나. 하는 깨달음에 안도감이 들었다. 베이킹을 시작하고 가장 먼저 만난 허들은 계량이었다. 이렇게 오래 걸릴 일인가. 남들은 휘리릭 하는 일인데 또 나만 이렇지. 계량을 정확히 하기 위해 조금씩 조금씩 덜다보면 한세월 걸리고, 과감하게 와앙 넣다 보면 넘쳐버린 만큼 다시 덜어내느라 또 시간이 걸렸다. 정말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초보에게나 전문가에게나 계량은 어쨌든 문제였다. 유후(?)
지금은 몸에 익은 일이고, 동생이 나의 장점으로 꼽을 만큼 손이 빠른 편이라 계량에 걸리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다만 빠른 손으로 많은 사고를 친다. 역시 하나를 취하려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가끔 동생과 서로의 작업을 위한 계량을 도와주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고 중요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거 아니야.)
계량 시간을 줄이는 것만큼 쾌감을 주는 건 정확한 계량이었다. 처음 미세저울을 샀을 때 0.1g 단위로 정확히 계량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시원스러웠는지. 이제는 미량계가 없으면 제대로 계량하지 않은 기분이다. 얼마 전 소중히 여기던 독일제 미량계가 고장 나는 바람에 새 저울을 주문했는데, 배송이 오기까지 며칠간 어찌나 찝찝하던 지. 새로 산 미량계는 독일제는 아니지만 이전 저울보다 반응 속도가 빨라서 만족하며 쓰고 있다. (역시 새거 최고) 처음엔 음소거로 쓰다가 뾱뾱 소리가 나야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 것 같고 '자 이제 계량 시작!'이란 신호를 받은 느낌도 들어서 다시 소리를 살렸다.
미량계를 쓰면서 집착적으로 정확한 계량에 신경 쓰던 때를 지나 지금은 어떤 재료들은 오히려 조금 여유롭게 계량한다. 소실분이 생기기 때문이다. 심지어 마른 볼에 계량하는 가루재료도 어느 틈엔가 조금씩 소실된다. 볼에 달라붙어 사라지는 양, 볼 밖으로 날려 사라지는 양, 볼에서 볼로 옮길 때 소실되는 양 때문에 처음 계량한 양이 유지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소실분을 계산해 몇 그램 더 계량한다. 사라져도 아쉽지 않게 처음부터 준비한다. 그건 나에게 잘 맞는 방식이다. 소실분에 대해 미리 대비하는 방식.
어떤 일에 타격받지 않도록 미리 시스템에 명령어를 입력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빈말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Q는 빈말을 자주 하는 사람이니 이번에도 마음에 두지 말고 인사말로 생각할 것."이라는 명령어를 넣어준다. 타격감을 줄이기 위한 준비라는 면에서 소실분을 염두에 둔 계량과 같은 맥락이다.
"약속을 잘 어기는 R: 이번 약속도 깨뜨릴 수 있으니 마음의 준비를 할 것."이라는 명령어를 미리 넣어두면 그 일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R을 덜 미워할 수 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수 있는 Plan B도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나를 제대로 작동시키기 위해 이런 식의 명령어를 종종 업데이트한다.
바닥에 흘리지 않아도 재료들이 소실되는 것처럼 인생에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에 대비해 명령어를 다양하게 넣어주면 좋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감이 느려서 많은 경우 사건이 벌어진 후 명령어 생각을 한다. 그런 일이 잦다. 그렇게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더라도 다음 나쁜 일을 대비해 여분의 마음을 계량한다.
당연하게도 마냥 좋기만 할 수 없는 게 인생이고 나쁜 일이 더 나빠질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으니 그런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몇 그램의 마음을 준비한다. 이것을 여분의 희망이라 부를지 절망이라 부를지 정하지 못했다. 그 이름을 뭐라 부르더라도 다만 몇 그램을 이미 계량하듯 명령어를 잘 넣어두는 일은 꾸준히 할 생각이다. 나를 제대로 작동시키고 나의 세계를 잘 굴리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