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스타벅스 다이어리를 받으며 내가 스타벅스의 열렬한 지지자라는 사실을 자백했다. 와이파이의 노예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 때문에 스타벅스에 매인 몸이 될 줄이야. 조용한 동네 카페, 게다가 커피 맛도 좋고 조명은 적당히 어두우면서 공간이 널찍해서 몇 시간 앉아있어도 주인의 시선이 부담스럽지 않은 곳은 우리 동네에 없었다. 카페가 넘쳐나지만 내 카페가 없는 형국은 집이 아무리 많아도 내 집은 없다는 진실과 닿아있다. 결국 애초 의도와 심각하게 반대되는 시내 중심에 위치한 대형 스타벅스를 단골 삼게 되었는데 2층 구석진 1인석에 앉게 되면 몇 가지 조건은 만족스러운 상태가 된다. 불행히도 오늘은 추위를 피해 스타벅스를 대합실 삼은 젊은이들이 자리를 다 차지해버린 탓에 단골 자리를 잃고 다인용 테이블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노트북 선을 꽂을 수 있는 자리였으니 말이다.
처음 내 앞과 옆을 에워싼 여성들은 서로를 ‘baby’라고 거칠고 사납게 부르는 20대 초반 대학생이었다. 서로의 연애사를 질펀하게 씹어주다가 한 여성이 먼저 자리를 떴고, 나는 자리 비운 사람의 서러움을 확실하게 목격했다. 저들은 내년 12월을 함께 보낼 것 같지 않았다.
어제부터 이 스타벅스에서는 '걸어서 세계 속으로' 시그널 음악을 들어준다. 다음 주에 있을 나의 치앙마이 여행을 축복하는 음악처럼 들린다. 우리 사이엔 묘한 교감이 이뤄지고 있다. 최민석 작가의 ‘베를린 일기’를 페이스북 연재 시절 애독하던 1인으로써, 오늘 출간 일에 맞추어 책을 산 다음 여기 단골 스타벅스에서 읽겠다고 다짐했다. 바로 드림 서비스를 신청하는 와중에 내가 직접 책을 찾을까 하다 혹시 두 권뿐인 재고가 사라지면 어쩌나 조바심이 나서 직원이 찾아두는 편을 택했다. 애타는 독자 마음을 알 리 없는 교보문고는 바로 드림이란 말이 무색하게 책이 준비되었다는 문자를 오래도록 보내지 않았다. 결국 40분 후 교보문고 앞에 도착해서 서비스를 취소했다. 밀당의 실패는 곧 마케팅의 실패다. 취소사유로 ‘배송일자 불만족’을 선택했다.
다행히 2권의 재고는 그대로였다. '베를린 일기'를 출간 일에 맞춰 사는 독자가 적어도 우리 지역구에는 2명 이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책은 신간 에세이 코너가 아닌 벽면 에세이 코너에 분홍 책 등을 보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은 단골 스타벅스에 앉아 ('걸어서 세계 속으로'가 끝난 후로) 클래식 캐럴을 들으며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고 ‘베를린 일기’를 탐독 중이다. 다시 읽어도 즐겁다. ‘척’ 하지 않는 글쓰기를 찬양하는 독자에게 이 책의 매력은 충분하다. 힘 빼는 글쓰기는 힘 빠진 글쓰기가 아니라는 확신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며 나에게도 동백림이든 구라파 아무 도시든, 아시아 아무 도시든, 나라 밖 어디에서든 100일간의 일기를 써 볼 기회가 찾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한 때 출장을 가면 꼭 갈겨쓰는 몇 줄이라도 매일 기록을 남기려고 노력했었다. 처음엔 감상을 적고 일정을 적다가 한 일을 적고 만난 사람들에 대해 적었는데 다시 들춰보면 그다지 의미 있는 내용이 아니다. 그래도 출장지마다 작은 수첩 하나씩 쌓아가는 건 의미 있었다. 그런 일을 해 본 지 2년이 넘었다. 내가 의미를 발견해 가던 일들이 점점 사라지는 걸 경험한다. 2016년은 ‘소실’의 해다. (대한민국이 ‘순실’의 해인 것 역시 나에게 ‘소실’의 의미를 더해주었다.)
인생의 저점에서 유머가 더욱 간절해진 1인으로써 '베를린 일기'를 출간일에 맞춰 사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덕분에 우리 지역구에는 나처럼 인생의 저점을 맞아 유머가 간절한 사람이 최소 2명이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인생의 저점을 만난 사람에게 하나 더 간절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면세점 쇼핑이다. 늘 셔틀에만 충실했던 인생이지만 지난 끄라비 여행부터 나를 위한 쇼핑 맛을 알게 되었다. 좋은 벗이 알려준 포인트와 쿠폰 야무지게 흩어 쓰고 모아 쓰는 법 덕분에 제법 만족스러운 쇼핑을 했다. 일 년 내내 핸드크림을 끊이지 않게 사들이는 前아토피 환자로써 가성비 중심적으로 핸드크림을 사용해왔지만 이번엔 경험해본 바 최고의 향과 부심을 안겨줄 쥴리크 핸드크림을 주문했다. 때는 2007년 겨울, 해외출장 다녀온 모 PD께서 작가들에게 쥴리크 핸드크림 미니 사이즈를 돌린 적이 있는데, 그때 써본 핸드크림의 감촉과 향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누가 빌려달라고 할까 봐 주머니에 넣어 다니며 혼자 발랐었다. 가격이 도도했지만 압도적인 경험을 안겨 준 핸드크림이었다. (점점 글을 되는대로 휘갈기고 있다는 느낌이다.) 춥고 외로운 인생의 저점을 맞이한 나에게 쥴리크 핸드크림의 향과 부심을 입혀줄 때인가 싶어 고심 끝에 주문했다.
이 책은 어렵지 않다. 누군가의 여행길에 즐겁게 읽으라고 추천해주고 싶은 정도의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장이 예상보다 느리게 넘어간다. 피식거리게 되고 공감하다 생각에 빠진다. 수시로 책을 내려놓고 뭔가를 끄적거리게 된다. 뭔가를 쓰고 싶게 만드는 책이 나를 찾아온 것이다. 타자를 치는 손과 무릎이 시리다. 스타벅스는 앞으로 난방에 더욱 신경을 쓰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물론 내가 무릎담요를 준비하는 방법도 있다.
어쨌든 ‘베를린 일기’는 저자의 작가 인생에 전환점이 되어줄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짐작해본다. 기회가 생길 때마다 친구들에게 추천할 것이고 또 다른 기회가 생기면 선물도 할 것이다. 역시 꾸준히 뭔가를 하는 건 의미 있다. 동백림의 외롭고 쓸쓸한 ‘인간 초코송이’ 시절엔 최민석 작가도 이 책의 출간을 진실로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예상 없이 성실했기에 오늘 출간 일에 맞추어 책을 사서 읽는 나 같은 독자가 있는 것 아닐까. (내가 독자로써 대단히 의미 있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나는 그저 입소문을 낼 준비가 된 독자일 뿐이다.) 나도 무언가를 예상하지 않고 그저 성실해봐야겠다.
오랜만에 다인용 테이블에 앉아보니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생각보다 주변이 많이 거슬리지 않았다. 어쩌면 나는 주의력이 아주 모자란 편은 아닌 걸까. 이제 오늘의 저녁 스케줄을 차질 없이 진행하기 위해 자리를 떠날 시간이다. 저녁 스케줄이란 영양 듬뿍 저녁 식탁을 차려먹고 무한도전을 시청한 후 '베를린 일기'를 읽을 시간이 없다는 것을 눈치채고 조금 더 이불속에 누워있다가 도깨비 4회를 시청하는 것이다. 이제 이마트에 가서 저녁 장을 보는 이후 스케줄을 시작하겠다. 오늘만큼은 빵을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어젯밤 둘째 딸이
-언니는 영양을 위해 좀 더 다양한 걸 먹는 게 좋겠어.
라고 말하는 순간, 요즘 부쩍 눈이 침침해진 건 영양 불균형 때문이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침 오늘 영양 면에서 부족함 없는 아침을 거하게 챙겨 먹었으니 저녁식단에 좀 더 신경쓰기 위해 과감히 빵식을 포기한다. 이런 날일수록 애정 없는 빵집에 가야 한다. 예를 들면 O**같은. 무슨 빵을 파는지 탐색하고 시식 빵이 있다면 몇 개만 맛을 보고 '역시 여기는 내 취향이 아니었어.' 하고 나오면 되는 것이다. 잘 먹고 사고 읽고. 예상에 없었지만 성실했던 하루다. 저녁엔 아직 남은 참소라를 하나 더 먹을 생각이다. 자, 다시 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가자. 덤덤히. 하루가 짧다. 밤에는 다시 ‘베를린 일기’를 읽고 또 뭔가를 끄적일 것이다.
* 오늘의 저녁 예상 식단은 늘 먹던 것들에 엄마가 맛있게 볶은 멸치볶음과 진미채 볶음, 참소라, 그리고 고구마나 애호박을 추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