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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Feb 19. 2017

100은 힘이 세다

100은 배움의 세계에 접어든 후 가장 높은 자리에서 나를 굽어보는 숫자였다. 엄마가 총애하는 숫자로써 시험을 앞두고 수시로 부르짖는 구호이기도 했다. 100의 가치를 보기 쉽게 증명해 준 것은 큰 이모였다. 큰 이모는 100점 당 1000원이라는 대범한 배팅으로 나를 놀라게 했는데 엄마가 아무리 100을 좋아해도 그런 배팅을 한 적은 없었다. ‘1년에 4번 시험 때마다 괜히 ‘큰’ 이모가 아니구나.’ 감탄했다. 그렇다고 놀 궁리에 빠진 초등학생을 책상 앞에 끌어올 만큼 매력적인 베팅은 아니었다. 모름지기 돈이란 사리분별이 되는 나이부터 매력 발산이 가능하다.

 

20대를 막 준비하는 시기에 100은 4명의 친구를 데려왔다. 400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신기루였다. 나와 친구들은 400에 가까운 순서대로 줄을 서서 대학에 들어갔다. 나는 줄을 두 번이나 서고 한 해 늦은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초중고 그리고 더하기 1년을 100과 함께 보내고 비로소 대학생이 된 후 지긋지긋한 100과 헤어진 것이 후련해서 한동안 자기 전에 씨익 웃음이 났다.


몇 년 후 재회한 100은 많이 달라 보였다. 모니터 속에서 오와 열을 맞춘 100. 흐트러짐 없이 깐깐해 보이는 건 그대로였다. 내가 쓸 수 있는 건 띄어쓰기 포함 100글자뿐. 약 50분짜리 프로그램 안에 3~4개의 아이템이 있는데, 그걸 100글자로 줄이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띄어쓰기는 소중한  네모 칸을 당당하게 잡아먹는다. 아직 쓸 말이 많은데 깍두기가 벌써 끝났다. 맙소사! 앞에 쓴 것들을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 가끔은 딱 한 글자 쓸 자리가 없어 앞에 쓴 글자들을 모조리 지워냈다. ‘차라리 A4 2장을 쓸게요. 100글자로 줄이는 건 너무해!’ 할 일은 게르만 전차군단처럼 진격해오는데 이놈의 100글자가 도무지 퇴로를 허락하지 않는다. 고작 100글자가 뭐! 하고 무시하고 싶지만 절대 쭈구리가 되지 않는 100. 100글자를 채워내서 채워 팀장님 앞에 가져가면 이런 말들을 해주셨다.


음. 좀 더 매력적으로 쓸 수 있지 않니? 
짧고 강렬하지만 감동적이면서 시선을 사로잡는 한 문장만 써봐라. 
좀 더 생각해보자.
나쁘진 않아. 좋지도 않아.



한 번은 100 때문에 이런 나사 빠진 대꾸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너라면 이렇게 쓰지 않았을 텐데.
(팀장님, 그건 고등학교 영어시간에 if에 대해 배울 때나 예문으로 쓸 법한 말 같은데요.) 그래서 저는 막내고 팀장님은 팀장님이잖아요.


그때 해주신 말을 모아도 잠언 집 한 권은 쉽게 나온다. 그나마 제일 듣기 좋은 말은 


밥 먹고 같이 고민해보자. 


였다. 어떤 날은 출근부터 퇴근까지 10시간가량 100글자와 함께 보내기도 했다. 1년 반 만에 100과 후련한 두 번째 작별을 했다. 뒤이어 등장한 것은 홀쭉한 100이었다. 대본은 10초를 기준으로 썼다. 10초 안에 얼마의 말을 쓸 것인가. 내가 10과 싸워 처음 KO패 당한 날은 지고도 기분이 상쾌했다. 목요일 밤 홍대로 술 마시러 가려던 밉상 선배는 나를 생각해주는 척 


너한테 기회를 주는 거야. 너 막내가 언제 이런 거 해보니? 다른 막내들은 이런 기회도 없어.


라며 특파원 PD의 원고를 내던졌다. 세상에. 나는 갑자기 미국의 경제위기와 인사를 나누는 어색한 사이가 되었다. 자, 이제 미국의 경제위기를 10초 단위로 잘게 썰어보자. ‘서브프라임 모기지’라. 모기지가 영어였어? 밤은 짧았지만 원고는 길었나 보다. 내가 쓴 문장들은 10초 안에 최선을 다해 욱여넣어도 불어 터진 국수 가락처럼 원고 전체에 보기 싫게 주르륵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밤새 술 푸던 선배는 다음날 아무것도 모르고 느지막이 출근해선 내가 망쳐놓은 원고 꼴을 보고 술기운이 더 올라왔을 것이다. 


지난번엔 잘 하더니 이게 뭐니! 
(그러게요. 지난번엔 어쩐지 감이 잡히던데, 이번엔 무슨 일인지 제가 이 모냥으로 썼네요. 미국 경제위기가 미국 대통령도 깔끔하게 못 줄이는 문제다 보니...) 죄송해요...


원고가 늦어지는 바람에 결국 선배가 원고를 던져놓고 술을 펐던 사실이 알려졌다. 아오! 꼬숩다. 10과 나는 죽이 잘 맞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때 이 말을 하지 못했는데 오늘 해야겠다. 쌤통이다!(뒤끝은 이런 맛이지.)



최근에 찾아온 100은 좀 복잡한 관계들이 많았다. 소고기 218, 호밀빵 259, 콩나물무침 47 주꾸미 볶음 193 파프리카 20, 곤약 30, 밤  143, 된장찌개 88, 연근조림 96, 바닐라 마카롱 120. 


100g 에 해당하는 칼로리들이다. 어떤 음식은 너무 양이 적고 어떤 음식은 예상보다 양이 넘치도록 많다. 얼마 전에는 오리고기 주물럭을 처음 저울 위에 올려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세상에 겨우 시식할 만큼 담았는데 벌써 100g이 넘는다. 벌써 저 아래에서 위장이 부르는 소리가 식도까지 들리는데 응답할 수가 없다. 다음 주엔 된장찌개나 퍼먹어야겠군. 이럴 줄 알았으면 낮에 빵을 조금만 먹을  걸. 밥그릇에 겨우 1/3 만큼 올라간 오리고기는 감칠맛 대신 감질 맛을 남겼다. 최근에 계량용 저울을 산후에는 음식 칼로리의 실체를 명확히 알게 되었다. 맛보다 양을 선택하는 내가 저울을 산 것은 몹시 곤란한 진실을 대면하는 행위였다.  


평생 함께 한 100이지만 우리는 살갑고 애틋한 사이가 아니다. 좋은 기억을 애써 찾아보면 100원에 7개 주던 떡볶이, 10개 주던 풀빵, 2개 먹던 달고나. 1개짜리 떡꼬치. 죄다 먹는 것들이다. 이렇게 먹는 걸 좋아하는데 100g의 엄정함에 나는 또 무릎을 꿇는다. 100은 여전히 나의 위장과 식도를 억압하는 그림자. 우리가 친해지는 건 좀 더 시간이 필요하겠다. 


그나저나 저녁엔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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